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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집] 순교자와 그 후예들 죽기까지 - 하느님을 사랑한 신앙사랑
첨부 작성일 2018-04-27 조회 596

순교자 현양 특강2

교자와 그 후예들 죽기까지 -

하느님을 사랑한 신앙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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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삼석 요셉 주교 부산교구 총대리

 

 

지난 3월 주교회의 봄 정기총회에서 조선왕조 치하 2차 시복 안건의 제목을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로 결정한 바 있습니다. 이제 1차 시복 대상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은 가까워진 듯합니다. 그런데 한국 천주교회에는 성인이 103위나 있는데, 과연 우리는 그분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안다고는 하지만 극히 단편적일 뿐이니 선조들에게 죄송스럽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보통은 한꺼번에 여러 성인 성녀가 탄생하는 게 아니고 한 분이 탄생하는데, 한 분이니까 그분의 삶과 행적을 철저히 조사해서 밝혀내고 또 성인전도 펴내 교우들이 그분의 삶과 행적을 본받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103위 성인은 여러분이어서 자료가 부족했던 게 사실입니다. 또 파리외방전교회가 주도해 시복시성을 추진했기에 우리가 접근하지 못한 측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1984년 5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시성을 하셨을 때 감동과 감응은 컸지만 그만큼 우리들의 삶이 따라가지 못한 게 사실이고 지금은 그 감동마저 많이 식었습니다.

 

성인과 순교자들의 가족 관계를 살펴 보자면, 정약종(아우구스티노)만 하더라도 큰아들 정철상(가롤로)과 함께 1801년 4월 신유박해 때 순교해 1차 시복대상자가 됐지만, 부인 유조이(체칠리아)와 작은아들 정하상(바오로), 정정혜(엘리사벳)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해 이미 성인 성녀 품에 올라 있습니다. 또 김대건 성인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나 조부인 김종한(안드레아),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의 부인 이성례(마리아)와 아들 최양업(토마스) 신부, 강완숙(골룸바)과 아들 홍필주(필립보) 등 많은 가족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유항검 아우 구스티노는 그의 가족 대부분이 순교를 했는데 이번 시복 대상이 되었습니다.

 

순교 성인 성녀와 시복 대상자들의 가계도, 즉 신앙 계보는 재미있기도 하지만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처럼 가족 순교자가 많다는 사실은 초기 교회 때부터 신앙 선조들이 가정을 통해 신앙 유산을 전했고, 그 신앙을 통해 먼저 성가정을 이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1. 조선시대 천주교회 박해들

그렇다면 조선에 천주교회가 들어오고 나서 100여 년간 얼마나 박해가 많았을까요? 크고 작은 박해가 무수히 있었지만 신유·기해·병오·병인 4대 박해가 가장 큰 박해였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신유박해와 병인박해가 규모도 크고 희생자도 많았습니다. 이 밖에 1785년 을사박해와 1791년 신해박해,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 등이 개항 때까지 전국 각지에서 이어졌습니다.

 

1) 신유박해(순조 1년, 1801년)

1801년 정월 나이 어린 순조(1790~1834년)가 11세에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1745~1805년, 조선21대 영조의 계비)가 섭정을 하게 되고 정순왕후는 천주교인들과 남인 시파를 일망타진하려고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일으켰는데, 그 규모가 하도 커서‘신유대박해’로 불릴 정도입니다. 오가작통법을 내려 전국의 천주 교인을 회개하지 않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도록 하라는 엄명을 내리기도 했으며 이 박해로 2월 정약종을 비롯한 5명이 참수당했습니다. 신유박해로 처형된 수는 100여 명, 유배된 수가 400명에 이르며 1차 시복 청원 때 신유박해 순교자 중 52분이 복자로 청원되었습니다.

 

2) 기해박해(헌종 5년, 1839년)

기해박해의 표면적 원인은 사학이라 불리던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것이었지만 시(時)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기 위해 벽(僻)파인 풍양 조씨가 일으킨 정치적 갈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엥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 등 세 선교사가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고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도 참수되었습니다. 참수된 신자는 70여 명이었고, 옥중에서 죽은 신자는 60여 명인데, 이 중 70명이 시성 되었습니다.

 

3) 병오박해(헌종 12년, 1846년)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는 9월 20일 종결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를 위시하여, 현석문 가를로(샤스탕 신부의 복사), 남경문 베드로, 한이형 라우렌시오, 우술 임 수산나, 임치백 요셉, 김임이 데레사, 이간난 아가다, 정철염 가타리나 등 순교자 9명 모두 시성되 었습니다.

 

4) 병인박해(고종 3년, 1866~1873년)

1866년 베르뇌 주교 등이 3월 새남터에서 순교하며 시작된 박해는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이후 병인양요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 었습니다. 순교한 신자는 대략 8000명에서 1만명 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그중 대부분이 무명 순교자 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는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브레트니에르, 도리, 볼레, 푸르티네,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와 유정률 베드로, 남종삼 요한 등이며 이들 중에서 이름을 알 수 있는 24명만이 시성되었습니다.

 

 

2. 순교가 어떻게 가능할까?

한국 교회사 관련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순교 사례는 최소한 2000여 건에 이릅니다. 전체 순교자 수는 일반적으로 5000명에서 1만명으로 보고 있고, 1만2000명에 이를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 습니다. 19세기 당시 조선왕조가 파악한 전국 인구가 700만명 안팎이었던 사실에 비춰보면 이 숫자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많은 사람들을 순교로 이끌었을까요?

 

‘순교’란 특별한 인간 능력과 철학적 준비의 열매가 아니라 신앙의 결과요, 시련의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확신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을 순교로 이끈 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백’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순교자들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에 절대가치를 두었습니다. 고문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당시 신자들은 예수님 생애와 자신의 고통에 찬 삶을 직접 비교하며 자신이 겪는 삶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신도 그분을 위해 고통을 당하고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박해 시대를 살았던 교우들은 특히 순교를 소망하도록 교육받았으며 순교의 기회가 닥치면 은혜로 생각하고 순교를 감행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물론 순교자들이 당한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이러한 순교가 결행된 배경에는 전통문화에서 강조해 온 ‘충효관’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창조적 결합이 작용했습니다. 조선 왕조 500년간 범죄한 죄인에게 내렸던 사약(賜藥)을 피해 양반이 도망간 기록은 단 한 건도 없는데 이는 사약을 받았던 당시의 양반들이 이를 받아 마심을 군주에 대한 마지막 충성으로 생각했고, 충성에 대한 관념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했던 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사회에서 임금에 대한 충성보다 부모에 대한 효도를 더 중요시하는 문화가 팽배하여 순교자들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부모에 대한 효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부모에 대한 효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신앙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부모나 천주냐, 인륜이냐 신앙이냐의 양자택일 속에서 신자들은 하느님과 신앙 때문에 무군무부(無君無父)의 패륜아로 지탄을 받게 되었고, 신앙을 버리고 부모께 대한 효와 천륜을 택한 이들은 배교자로 낙인을 찍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양자택일의 강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초래된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충효관은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에도 적용되었으며, 순교의 과정에서도 표현되고 있습니다. 즉 19세기를 전후한 조선 교회의 신자들은 천주를 대군대부(大君大父)로 인식했고, 대군대부 에 대한 대충대효(大忠大孝)를 드려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 대충대효의 실천을 위해서는 순교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볼 때 우리 초기 천주교회에서 순교자들을 순교로 이끈 동인은, 먼저 철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백’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통문화에서 강조해 온 충효관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창조적 결합이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충효의 결과로 획득된 불교적 환생의 모티브들은 가톨릭의 부활로 더욱 쉽게 연결될 수 있었으리라 판단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해 서 획득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인식은 그들의 순교가 가지고 있는 의로움과 정당성을 확인시켜 주는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이기적인 삶이나 마음으로는 순교를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나 천국에 대한 열망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어야 순교가 가능합니다.

 

 

3. 오늘 이 시대에서 ‘순교’란 무엇인가?

‘순교‘란 과연 무엇이며 ‘순교자‘란 누구인가? 고전적 순교 개념에 따르면, 순교자란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충실한 나머지 신앙 고백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행동으로 증명하고 행동으로 고백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순교자라 함은‘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 때문에 타인들의 증오와 죽음을 참아 받는 피의 증인’을 일컬었습니다. 이런 순교의 개념은 교부 시대 이후부 터 보다 넓은 의미를 지니고 사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고 현실적으로 자신의 뜻과 많은 것을 철저하게 포기하는 은수 생활이거나 수도 생활이 실제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증명한다는 관점이 서서히 형성되면서 은수생활이나 수도생활이 넓은 의미의 순교적 삶, ‘무혈 순교’의 삶이라고 교부시대 이후 이해되어 왔던 것입니다.

 

주교로서 교구 일을 하면서 그동안 늘 인간적으로 세상의 가치판단과 평가를 해왔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마음, 믿음 이 적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거나 맡는 것이 아니고 인간적으로 온갖 분석과 궁리, 연구를 다하고 마지막 으로 도저히 안 될 때 주님께 기도하고 의탁합니다. 그러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고 고친다 해도 결국 주님께서 그 의사의 손을 통해서 고쳐주심을 우리가 볼 줄 알아야 하듯이,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주님께 의지하고 맡기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순교 성인성녀들께서는 목이 잘리고, 매를 맞고, 굶주리고 목말라 죽어가면서도 모든 것을 주님께 다 맡기신 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교정신이고 주님께 대한 믿음의 발로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여러모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열심한 교우도 많지만 교우들의 신앙심이 이전 같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순교’나 ‘순교정신’을 떠 들지만, 순교자들의 순교정신과 삶은 계승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미지근한 우리 신앙에 활력소를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려고 목숨까지 내던졌던 순교자들의 정신과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죽기까지 사랑하고 예수님 말씀과 행동을 죽기까지 따라야 하며 몸과 마음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혼탁한 세상에서 올바른 그리스도교 신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 입니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오늘날의 신자들이 ‘부분적 신앙인’이 아니라 ‘전체적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 삶의 액세서리나 일부분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순교 정신이 없으면 이런 것이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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