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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평신도
  • 2013년 겨울 / 계간 42호
    형제애(兄弟愛)와 가정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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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성] 성탄의 의미
첨부 작성일 2018-04-26 조회 529

성탄의 의미


오창익 루카 (인권연대 사무국장)

 

 

 

성탄이다. 성탄은 역시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게 중요하다. 어렸을 적엔 비록 산타할아버지의 선물 때문이겠지만, 흠뻑 느낄 수 있었다. 나이 탓일까. 왜 느낌이 잘 안 오는 걸까. 11월부터 거리에 크리스마스트리가 등장했지만, 느낌은 영 아니다. 대림 시기를 거쳐도 마찬가지다. 그저 심드렁한 풍경일 뿐이다. 매년 그저 그렇다. 느낌이 신통치 못한 탓일 게다.

 

성탄의 의미야 많이 들었다. 하느님의 아들이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낮은 곳에 왔다. 제대로 된 방도 아니었다. 산모 구완을 맡아줄 산파도 없었다. 고향도 아닌 곳, 뿌리 내리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의 출산이었다. 주몽이나 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고, 현실 정치인 케사르(카이사르)도 집권세력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명문 귀족 출신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는 왕자였다. 유독 예수의 탄생은 초라하다. 그게 바로 성탄의 의미다. 유아세례 이후, 초등, 중등 과정의 주일학교를 다니며 자주 들었던 이야기다. 그래서 성탄에 대해 안다고 말하는 건 조금도 과장된 게 아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느끼는 것, 그리고 사는 것은 다르다. 안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아니고, 느낀다고 그렇게 사는 것도 아니다. 성탄의 의미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많은 이 땅의 현실은 예수가 태어난 그 시절처럼 고단하기만 하다. 누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새로운 유형의 가난도 힘겹지만, 희망을 찾기 어렵다는 게 더욱 힘들다.

 

어떤 가수는 몸의 중심은 아픈 곳이라 했다. 손끝, 발끝이라도 아픈 곳을 그냥 뒀다간 온 몸이 썩어 들어가 마침내 목숨을 잃게 된다. 대개 머리나 심장, 또는 단전이 몸의 중심이라 여기지만, 실제 몸의 중심은 아픈 곳이다. 그래야 살 수 있다. 한 아기는 비천한 신분, 떠돌이 신세, 말 먹이통에 누운 신세였지만, 작고 나약한 존재이기에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성자의 권위 때문이 아니다.

 

그 작고 나약한 존재의 탄생이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그리스도 교회는 바로 그 비천한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부활의 영광 이전에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고, 예수의 가르침 이전에 초라한 아기의 출생이 있었다.

 

우리 주변에도 비천한 예수는 널려 있다.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버렸다”는 교황의 말씀처럼, 살아있는 느낌으로 그들을 만나지는 못하고 있다. 한 대학교의 일이다. 이 학교의 이름은 꼭 거명해야 하겠다. 인권의 무기는 고작해야‘거명하며 창피주기(Naming &Shaming)’뿐이니. 광운대학교. 이 학교 청소노동자의 딸이 암투병을 하다 죽었다. 임종시간은 새벽 1시 반. 어미는 딸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학교에 나왔다. 새벽 3시. 그가 맡은 청소를 다 끝낸 다음에야 딸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청소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대학 총장실을 점거하고 나서야 이런 일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슬픔이 어디 한둘일까. 그 청소노동자의 아픔도 세상의 중심이어야 했다. 신화적 요소를 거두고 보면 역사적 예수의 탄생은 그 부모, 딱 두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사건이었을 게다. 비천한 사람들, 뿌리 뽑힌 사람들의 나고 죽음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자들의 태어남이고 삶이고, 죽음이다.

 

가난한 사람의 처지는 늘 고약하다.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이 매년 4만명이 넘는다. 벌금, 과태료 등의 범칙금 등의 세외(稅外) 수입을 늘려 창조경제를 만들겠다니, 올해엔 4만명을 훌쩍 넘을지도 모른다. 죄질이 나빠서가 아니다. 격리해야 할 만큼 위험해서도 아니다. 그저 돈 대신 몸으로 때우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자체로 징벌이다. 죄 없는 사람들이 죄를 받고 있다. 1년 동안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가는 사람들을 구하려면 연간 2조원이 넘는 돈이 필요하다. 그 엄청난 돈을 감당할 능력이 교회에는 없다. 하지만 제도를 좀 더 인간적으로 고치는 역할은 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이런 일에 관심을 보이는 교회 사람들은 거의 없다. 들리지 않는 깊은 속울음이기에 듣지 못한 탓일 게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들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예수의 탄생도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사건은 아니었다.

 

 

누구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아픔, 목소리조차 새어나지 않는 속울음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할 자리다. 그걸 느끼라는 게 바로, 성탄의 온전한 의미다.

 

교회의 활약이 다른 종단에 비해 눈부신 건 사실이다. 정의, 평화, 인권을 위한 헌신이 돋보인다.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눈부신 활약에서 평신도들의 자리는 별로 없다. 수도·성직자만의 교회도 아닌데, 세상에 대한 외침, 헌신과 봉사는 오로지 수도·성직자들만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 평신도들은 멀찍이 떨어져, 그저 가르침의 대상으로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학습(學習)이 아니다. 배움은 있을지 모르지만, 익힘은 없다. 역동적인 성직자, 수도자들처럼 평신도들의 활동도 보다 더 역동적이었으면 좋겠다.

 

사회교리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이념과 원리,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담고 있다. 세상에 대해서는 세상에 속해 살고 있는 평신도들이 누구보다 잘 안다. 자칫 관념에만 머물 수 있는 사회교리를 풍성하게 하고, 현실적 상상력을 담아 재구성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평신도들에게 있다.

 

성탄은 새로운 시작이다. 고단한 세속의 삶을 온몸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평신도들이 성탄의 의미를 알고 느끼면서, 새로운 시작을 다짐했으면 한다. 사회교리를 수동적 입장에서 그저 듣기만 하는데서 벗어나, 사회교리의 실천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회교리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변화, 곧 아픈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역할이 우리 평신도들의 몫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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