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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평신도
  • 2015년 봄 / 계간 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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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첨부 작성일 2018-04-08 조회 923

복자들의 영성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한국교회의 영원한 평신도의 귀감

김길수 사도요한 전 대구가톨릭대 교수

 

형리들은 곧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참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나무토막 위에 머리를 대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는 태연히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똑바로 머리를 누이면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죽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47-3.JPG


선정을 베풀어 팔도 선비들의 존경을 받던 진주목사 정재원은 아들 넷을 두었습니다. 약현, 약전, 약종, 약용 이렇게 4형제인데 모두가 한국 초대 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중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은 정재원의 셋째 아들로 1760년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중 유조이(체칠리 아·1839년 순교)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정하상(바오로·1839년 순교) 성인과 정정혜(엘리사벳) 성녀와 이번에 새로 시복된 정철상(가롤로·1801년 순교) 복자는 그의 아들과 딸입니다.

달레 신부는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정약종을 두고 “천주교가 이 나라에서 가졌던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사람이며, 가장 위대한 순교자 중 한 사람”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우리는 이분이 새로 시복되신 것에 우리 교회의 숙원이 풀린듯 감격하면서 이 위대한 순교자가 성인으로 선포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삼가유덕을 기리고자 합니다.

그는 천성이 곧고 총명하며 연수심이 강하여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문필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점잖고 학식 있는 인사들과 교제하여 이가환 등 당대의 저명한 선비들과 친교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는 입신양명을 위한 과거 시험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에 증진하여 철학, 윤리 등의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한동안 그는 추종자들에게 불사의 비법을 얻겠다고 약속하고는 노자의 도를 연구하기도 했고, 또 의학에 심취하여 큰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 천주교가 전래되자 그는 곧 교리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즉시 교리를 따르지는 않았고, 오히려 이벽의 신앙생활을 염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791년에 그의 망설임은 끝이 났습니다. 이때가 제사 문제로 마음이 상한 지식인들이 교회를 떠날 때인데 그때 그는 성세 입교합니다.

그는 이때 자신이 처음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설였던 점이 마치 성 아우구스티노의 젊은 시절 지성의 방황과 닮았다고 생각하며 그를 자신의 수호성인으로 받들며 본명을 아우구스티노로 정했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이후 다시는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그는 어떤 찬사도 미칠 수 없는 열심과 항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1791년 진산사건으로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비참하게 배교한 형제와 친구들 속에서 그는 뛰어난 모범으로 신앙생활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약종을 친하게 지냈던 황사영은 그의 사람됨에 대해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세속 사정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오직 철학과 종교 연구를 즐겨 하였다. 교리의 어떤 점이 분명치 않다고 생각될 때에는 그것을 연구하느라 침식을 잊고, 그것을 밝힐 때까지는 휴식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길을 가거나 집에 있거나, 말을 타거나, 배를 타거나 깊은 묵상을 그치지 않았다. 무식한 사람을 만나면 온갖 정성을 들여 그를 가르쳤으며,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그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귀찮아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는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아무리 우둔하더라도 그들에게 자기의 말을 이해시키는 데 신기할 만큼 능숙했다. 그는 조선 말로 <주교요지>라는 두 권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책에는 그가 천주교 서적에서 본 것을 모아 놓은 다음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으며, 무엇보다도 명백히 그것들을 설명하는 데 힘썼다. 이 책들은 이 나라의 새로운 교우들에게 귀중한 길잡이가 되었으며 주문모 신부도 그것을 인정하였다. 정약종은 교우들을 만나면 인사를 나눈 후 공교리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리 이외의 쓸데없는 말을 끼울 수가 없었다. 그가 통달하지 못했던 어려운 점을 누군가가 풀어 주면 그는 마음에 기쁨이 넘쳐흘러 그 대화자에게 뜨겁게 감사하였다. 반면 냉담자나 우둔한 사람이 구원의 진리를 기꺼이 듣지 않으면 그는 근심과 걱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온갖 문제들을 질문하였는데, 그는 정확한 답변과 단순하고도 명백한 말로써 사람들의 가슴속에 신앙을 굳게 하고 애덕을 더하게 했다.”

그는 당대 가장 뛰어난 교리지식을 바탕으로 교리서인 <주교요지> 상, 하를 저술하여 당시 중국의 교리서인 <성세주요>를 능가하였고 종합 교리서인 <성교전서>를 집필하던 중 1801년 박해로 순교하셨습니다. 마재에서 서울로 말을 타고 가던 중에 정약종은 금부도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누구를 잡으러 가는가를 알아보게 하여 금부도사가 정약종을 체포하러 가는 길임을 알고 그 자리에서 곧장 감옥으로 갔습니다. 심문을 받는 동안 그는 엄숙히 신앙을 고백하고 천주교 진리를 설명하고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을 배반하는 일에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체포된 날로부터 엄한 형벌과 문초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유혹과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고 교회와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오로지 천주교 교리가 올바르다는 것만을 설명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천주님을 받들고 섬기는 일에는 옳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천주님은 천지의 큰 임금이요, 큰 아버지입니다.
천주님을 섬기는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이는 천지의 죄인이며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박해자들은 아우구스티노를 굴복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모두 동원했지만 그의 신앙은 흔들림이 없었으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교리는 오히려 박해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조정에서는 의금부의 사형 선고를 허락했습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최후는 그의 일생과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형장으로 끌려갈 때 그의 얼굴은 어떠한 희열에 잠긴 듯 아주 빛났습니다. 도중에 그는 수레를 끄는 사람들을 불러 “목이 마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물을 청하는 것을 나무라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며 “내가 물을 청한 것은 나의 위대한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의 모습을 본받기 위함이요.”라고 했습니다.

옥중과 법정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치지 않고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며 전교하였던 그의 최후의 순간인 순교의 형장에서도 열정을 다해 교리를 설명하여 형장이 마치 열정어린 전교의 강단인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는 도구로 상용될 형구를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나서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스스로 존재하시고 무한히 흠숭하올 천지 만물의 대주제이신 분이 당신들을 창조하셨고 보존하십니다. 당신들은 모두 회개하여 당신들의 근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분을 어리석게 멸시와 조소거리로 삼지 마시오. 당신들이 수치와 모욕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내게는 곧 영원한 영광거리가 될 것입니다.” 형리들은 곧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참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나무토막 위에 머리를 대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는 태연히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똑바로 머리를 누이면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죽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그의 형장에서의 열변과 의연한 마지막 자세를 보고 망나니는 벌벌 떨며 감히 칼을 내리치지 못했습니다. 관장의 지엄한 독촉을 거듭 받고서야 마지못해 자신이 없는 손놀림으로 첫 번째 칼을 겨우 내리쳤는데 이로 인해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목은 절반밖에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선혈이 낭자하고 보는 이들은 더욱 긴장했습니다. 순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 어섰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그는 조용히 크게 십자성호를 긋고 다시 누워 칼을 받을 자세를 취했습니다.

 

‘순교의 칼’

그것이 소원인 듯 태연한 그의 모습에 장내는 일순 숙연해졌습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칼을 받고서야 그토록 열망하던 순교의 영광 속에 그의 영혼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한국 최초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회장, 한국 초대교회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분, 그리고 가장 위대한 순교자 중 한 분이신 그는 나그네로 이렇게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시신은 정성스럽게 거두어져 그의 가족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옮겨가 장례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의 친척과 인척들은 외교인이건 천주교 신자이건 그의 무덤에서 여러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다고 단언했습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반역죄로 기소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재산은 모두 정부의 특별한 명령으로 몰수되었습니다. 그때 맏아들인 정철상 가롤로 복자는 아버지와 삼촌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옥 근처에 머물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던 중 삼촌인 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약용는 경상도 장기로 각각 유배되었고, 굳건히 신앙을 지킨 아버지의 옥중고초는 더욱 심해져 가기만 했습니다. 그 무렵 만고 효자인 정철상은 관료들로부터 아버지 정약종의 목숨을 담보로 주문모 신부의 소재를 알리라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유혹을 받기도 했습니다. 철상은 고심 끝에 아버지께서 신부를 밀고하고 목숨을 구걸하실 분이 아니라는 단호한 결단으로 이를 이겨냈습니다.

 

인간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고뇌를 승리로 이끌어냈지만 마침내 아버지 정약종이 순교의 영광을 얻자 바로 그날(1801년 4월 8일 - 음력 2월 26일) 국청의 명으로 아들 철상도 형조의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는 옥중에서 짚신을 삼아 겨우 먹을 것을 구하면서도 굳건한 마음으로 아버지 정약종의 뒤를 따라 순교하였고 이번에 시복되셨습니다. 그의 남은 가족은 고향 마재로 갔으나 국법을 어긴 죄인의 가족이라 냉대와 괄시를 받았습니다. 이 냉대와 시련 속에 우리의 위대한 평신도 지도자요, 순교성인이 되실 정약종의 어린 아들이요 정철상의 아우인 정하상 바오로의 어린 시절이 눈물 속에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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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탁희성 화백                                    
신유박해가 일어나 아버지 정약종과            
숙부들이 옥에 갇히자 정철상(가롤로)이          
옥바라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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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교리 지식을 바탕으로 알기 쉬운

한글 교리서 「주교 요지」를 쓴 정약종은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회장으로서

초기 한국교회에 큰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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