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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평신도
  • 2015년 봄 / 계간 47호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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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야기] 평신도와 사회참여
첨부 작성일 2018-03-25 조회 656

서상덕 기자의 교회 톺아보기

평신도와 사회참여

서상덕 편집위원

 

교회가 제대로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딛고 서 있는 세상에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의 요구와 복음적 가치가 어떻게 연결되어 사회를 변화시키고 복음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복음적 가치를 사회 안에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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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프란치스코 효과’를 몰고 다니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014년 8월 한국을 다녀간 후 신자들에게 ‘교황 방한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물었다.

응답한 이들 가운데 과반수인 51.9%의 그리 스도인들이 ‘세월호 유가족 위로’를 꼽았다. 이러한 결과는 일반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소장 강우일 주교)가 주교회의 2014년 추계 정기총회를 앞두고 실시한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이후 한국 천주교회 과제에 대한 조사’는 그리스도인, 특히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소명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한국교회 신자들은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 복음의 기쁨을 사는 교회,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교회로 변화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 응한 신자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 기간 중 행한 연설과 강론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것으로 꼽은 것도 ‘고통 앞에 중립 없다.’는 발언으로 알려진 로마행 기내 기자회견(51.9%)이었다. 그다음으로는 ‘부유하게 사는 수도자들의 삶이 교회에 상처를 입힌다.’는 내용의 수도자들을 향한 연설이 꼽혔다.

 

성속이원론과 한국교회

한국교회 밑바닥에 깊숙이 깔려 있는 시각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닷새 남짓한 기간에 던져 주고 간 이러한 떨림과 감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눈앞에서 벌어진 현실을 두고 분명 혼란스러워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모습이다. 한국교회가 지닌 독특한 문화와 풍토에 깊숙이 젖어 살아온 신자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온 면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신자들에게 교회는 세상과는 떨어져 서 있는 어떤 특별하고 고귀한 존재로만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교황이 우리나라 사정을 잘 몰라서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한다. 교묘한 꼬드김에 빠져서 세월호 유가족의 손을 잡아 주었을 거라고 말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이러한 반향은 한국교회, 나아가 교회가 딛고 서 있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자신을 지탱해 온 인식이나 삶의 방식과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과의 괴리에서 오는 불안과 동요는, 그만큼 오랫동안 한국교회를 지배해 온 성속이원론(聖俗二元論)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송창현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는 “성속 이원론이 지배해 온 과거의 교회는 세상이나 사회를 외면하고 교회만이 완전사회이며 선(善)을 독점한다고 생각해 왔다. 성속이원론에 기초한 정교분리(政敎分離)는 세속과의 단절을 강조함으로써 신앙과 교회가 사회 현실에 무관심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왕직 예언직 사제직을 통해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그런데 성속이원론에 빠지면 사회문제에 대한 예언직(豫言職)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멀어지기 십상이다. 이에 따라 자연히 인간의 자유, 인간 존엄성, 인간 해방 등 보편적인 가치는 외면하게 되고, 오히려 사회문제에 대한 참여를 단죄(斷罪)하는 경향까지 보이는 게 우리 현실이다.

 

정홍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는 “교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이원론적 사고와 싸워 왔다. 이원론적 사고에서 이단과 그 아류들이 파생되었기 때문에 성속이원론은 이미 교회가 이단의 원천으로 인정해 오고 있다.”고 말한다. 정교분리로 현실화되는 성속이원론은, 교회가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수행하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고 현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지도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초대교회 때부터 비판받아 왔다.

 

실제 성경에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만 봐도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을 어렵지 않게 톺아볼 수 있다. 예수님의 활동은 당대 지배층이나 기득권층에 매우 위협적으로 여겨졌을 만큼 정치적인 면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 써 붙여진 죄목 푯말 ‘INRI’가 이를 잘 보여 준다. 당시 총독 빌라도의 명령으로 붙인 이 푯말은 ‘유다인의 왕 나자렛의 예수’(Jesus Nazarenus Rex Judaeorum)(요한 19,19)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교도의 행정관이나 유다 사회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어떤 존재로 여겼는지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이 글자는 예수님께서 정치적 이유로 수난하셨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가까운 우리 역사만 봐도, 성속이원론은 교회로 하여금 가난하고 핍박 받는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보다는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체제와 공존하는 길에 서게 만든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 제국주의로부 터 야기될 수 있는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교회를 보호하는 일에만 매달렸다. 이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교분리 원칙을 선교 방침으로 하는 국가관을 형성하고 말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국가관은 해방 이후에도 한국교회 안팎에 오래도록 남아 왔다. 이 때문에 남북분단, 6.25전쟁, 군사쿠데타와 유신독재 등 격변하는 정치 사회 환경 속에서 복음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함으로써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방기해 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교회의 본질과 사회 참여

가톨릭교회는 본질상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16)이다.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어두운 곳에 빛을 던지고 썩지 않도록 일깨움으로써 세상을 하느님 보시기 아름다운 곳으로 일궈 가기 위하여 존재한다. 특히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구원하는 것(마태 25,31-40)이 교회의 가장 큰 존재 이유다.

 

따라서 어느 시대에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슬픔과 번뇌는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1항)

 

교회는 현실과 동떨어진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온 세상을 복음화하고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이기에 오히려 세상과 무수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지속적인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도 세상과의 관계는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교회는 교회가 속한 민족의 역사 안에서 사회적 역사적 주체이면서 객체로 존재하면서 그 민족의 역사와 함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팎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통계와 자료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대체로 정치에 무관심하고 보수적인 정치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 때문에 신자 개개인의 사회 참여에 대한 적극성이 점차 감소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의 사회문제 개입에 불편해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속이원론’에 바탕을 둔 이러한 신자들의 모습은 자선행위로의 도피, 개인적 영성운동 등만을 추구하게 만듦으로써 신앙생활을 개인주의적인 부분으로 국한시키는 경향을 낳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하지만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가 세상과 무관하게 지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오히려 세속 일에 너무 깊숙이 개입함으로써 ‘정교분리’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을 정도로 교회는 세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 왔다.

 

이처럼 교회가 세상과 깊은 관계를 맺어 왔던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다. 교회가 제대로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딛고 서 있는 세상에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리고 그러한 사회의 요구와 복음적 가치가 어떻게 연결되어 사회를 변화시키고 복음적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복음적 가치를 사회 안에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교회법에서 ‘젊은이들이 신체적, 윤리적 및 지성적 자질을 조화 있게 계발할 수 있고 더 완벽한 책임감과 자유의 올바른 사용을 터득하며 사회 생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되도록 육성되어야 한다’(제795조)고 가르친다. 여기서 강조될 것은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생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가’ 하는 점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참여란 인간이 자발적이고 헌신적으로 사회 교류에 투신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와 맡은 일에 따라 공동선을 증진하는 데 참여해야 한다. 이 의무는 인격의 존엄성에서 우러나는 것’ (1913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시민들은 가능한 한 공공 생활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1915항)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인, 특별히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의 참여는 개인이 책임을 맡고 있는 분야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비로소 실현된다. 일례로 인간은 자기 가족의 교육에 정성을 기울이고, 자신의 일을 양심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타인과 사회의 선익에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914항 참조)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 참여하는 방식은 각 나라와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또한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참여에는 모든 도덕적 의무와 마찬가지로 사회 참여자들의 끊임없는 새로운 회개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이 법의 구속과 사회적 의무의 규정들을 회피하기 위해 저지르는 부정행위와 여러 가지 다른 기만적 술책들은 정의의 요구와 양립될 수 없는 것이므로 단호히 단죄되어야 한다.(1916항)

 

이처럼 사회 참여는 복음화를 위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다. 따라서 공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믿음을 두는 가치와 그들이 이웃에게 봉사하도록 북돋워 주는 가치를 확립해 나가야 할 더 큰 책임을 지게 된다.(1917항 참조)

 

사회 참여, 사회생활에 대한 봉사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사회생활 안에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표지이다. 동시에 사회생활에 대한 교회의 봉사를 특징적으로 보여 준다. 평신도는 자신이 속한 가정을 비롯한 공동체, 자신의 일이나 정치적, 경제적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직’을 통해 하느님을 드러낸다.(「간추린 사회 교리」 551항 참조).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평신도의 다양한 영역에 대한 봉사 활동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접근한다. 인간에 대한 봉사, 문화에 대한 봉사, 경제에 대한 봉사, 정치에 대한 봉사다.

 

평신도들은 인류 가족을 섬기도록 불림 받은 이러한 봉사를 통해 모든 인간의 존엄을 증진하도록 부르신 주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게 된다.(「간추 린 사회교리」 552~553항 참조) 특히 정치 분야에 대한 봉사인 평신도의 정치 참여는 하느님의 정의 추구로 드러난다.

 

평신도의 사회생활 영역에 대한 봉사는 평신도의 복음적인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영역에서 진정한 인간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교회는 이러한 봉사 정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교회의 구성원으 로서 평신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삶을 현실 세계 안에 구체화하는 표징적인 삶을 살고 있다. 따라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은 단순히 제도 교회의 교계제도를 통해서나 일부 성직자 중심의 노력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노력을 포함한 모든 평신도들의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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