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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배움] 거룩한 빈자를 찾아서
첨부 작성일 2018-04-09 조회 730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영성 순례

거룩한 빈자를 찾아서

황인수 이냐시오 성바오로수도회 수사

 

성바오로수도회 황인수 이냐시오 수사가 김선명 스테파노 수사와 함께 2011년 7월 3~23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생전 행적을 둘러봤습니다. 교부신학을 전공한 수사답게 지역과

사물뿐만 아니라 성인의 영성까지 묵상하게 하는 순례기를 이번 호부터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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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거룩한 빈자를 찾아서

가까스로 열차를 탔다. 로마의 중앙역에 자주 왔던 터라 이곳을 잘 안다고 여겼던 게 화근이었다. 아시시행 열차를 타는 곳이 오른쪽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출발 시간이 다 되었어도 플랫폼에 기차가 안 들어오는 것이다. 이상해서 물었더니 반대쪽이라는 게 아닌가. 아뿔싸! 출발이 임박했으므로 배낭을 지는 둥 마는 둥 마구 뛰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아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플랫폼을 뛰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겨우 제 자리를 찾아 한숨을 돌리고 서로를 바라보니 얼굴이 온통 땀으로 범벅이다.

 

여기는 로마의 테르미니 역. 우리는 아시시의 가난한 성자 성 프란치스코를 찾아가는 길이다. ‘가난한 성자’라고 했지만 프란치스코에게는 오히려 ‘거룩한 빈자’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 거룩한 빈자, 이탈리아 말로는 ‘산토 포베렐로’(santo Poverello)가 된다. 그 어감을 살려 우리 말로 옮기면 ‘거룩한 가난뱅이’ 정도가 될까. 우리는 아시시의 이 가난뱅이를 찾아간다.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고 가난의 고귀함을 선포했던 성인을 만나러 간다. 가난은 온통 천덕꾸러기가 되고 욕심대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 세상, 때로 탐욕이 덕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1990년대가 시작될 때 우리 사회에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부유해지는 것이 모든 사람의 목표처럼 되어 버린 것 같다. 방송에서나 신문에서나 어떤 일이 가치 있다는 말을 할 때는 흔히 그것이 몇 조원의 투자 효과가 있다느니 몇 억원의 비용 절감 효과가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최고의 기준이 돈임을 이렇게 매일 무의식적으로 배우며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찾는 것을 만나게 된다. 단 진정으로 그것을 찾는 한에 있어서만. 어쨌든 열차는 놓치지 않았고 좋은 도반이 곁에 있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목적지가 있다. 이 여정의 끝에 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햇볕을 가리려고 내려놓은 커튼 사이로 스쳐가는 차창 밖 움브리아의 풍경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로 인사를 건넨다. “평화와 선!”

 

돗자리 숙소 순례자 숙소에 짐을 풀었다. ‘레 스투오이에’ (le Stuoie)라는 특이한 이름의 숙소다. ‘스투오이 에’는 ‘돗자리’라는 뜻인데 초창기 프란치스코회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말이란다. 1219년(또는 1217년) 5월에 5,000명 이상의 형제들이 총회를 열었을 때 벌판에 나뭇가지와 돗자리를 엮어 지은 숙소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 총회를 ‘돗자리 총회’ 라고 부른다고. 오월이면 밤에는 아직 쌀쌀한 때다. 숙소 사정이 그 정도였으면 음식 사정은 두말 할 필요도 없었을 터. 그러나 그때 페루지아, 아시시, 스폴레토 등 근방 사람들이 당나귀와 수레에 다 빵과 포도주, 치즈 등의 음식과 식탁보, 컵 등을 싣고 몰려왔다고 한다. 마치 복음서의 빵을 많게 한 기적 이야기를 보는 것 같다. “빵을 나눌 때 우리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빵을 나눌 때 우리는 형제자매를 알아본다.”고 했던 이는 도로시 데이였다. 하느님 나라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웅장한 성당을 짓고 멋있는 영성 강의를 들으려 여기저기 찾아다니지만 하느님 나라를 찾는 데는 덮을 담요 한 장, 이웃과 나눌 음식 조금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돗자리 총회’ 숙소는 아시시역에서 가까운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 옆에 있다. 이곳은 평야 지역이어서 수바시오 산의 사면에 자리하고 있는 아시시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한다. 기왕 순례를 온 것, 걸어서 가 보기로 했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부터 거리에 깔린 붉은 벽돌을 밟으며 아시시 시내로 올라간다. 1997년 지진으로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 무너지고 유명한 지오토의 벽화가 손상되었을 때 이탈리아 전역에서 복구 성금을 모았는데 그때 붉은 벽돌에 성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과 출신 지역을 적어 이렇게 깔아 놓았다고 한다. 재미삼아 벽돌 하나하나 살펴보며 걷자니 멀리 시칠리아 사람, 나폴리 사람, 베네토 사람...온갖 지역 사람들이 다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게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공통적이구나.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다만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숨는 것. 그가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누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사랑으로 불태우면 우리는 그를 성인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프란치스코 성인도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다. 1182년 초에 태어나서 1226년에 하느님께 돌아간 성인이 지금 우리 마음 속에 살아있는 것은 그분이 사랑한 것과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같다는 뜻이다. 옛사람의 말씀을 떠올린다. “얕은 못의 물이라도 바다를 본받을 수 있나니 그 본성은 같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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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길을 떠나다

키에사 누오바(Chiesa Nuova)에 도착했다. 이 건물은 1615년 프란치스코의 생가 위에 세워진 교회로 키에사 누오바는 ‘새 성당’이라는 뜻이다. 성당 앞 광장 한편에 청동으로 된 두 사람의 입상이 있는데 남자는 옷 같은 것을 들고 있고 여자는 쇠사슬을 들고 있다. 프란치스코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회심하자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고 여긴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는 격분하여 그를 가둔다. 그러나 어머니 피카 부인은 어머니다운 사랑으로 아들을 풀어 준다. 결국 프란치스코와 아버지 피에트로는 주교 앞에 가서 재판을 하게 되는데 프란치스코가 앞으로는 하늘에 계신 분만을 아버지로 부르겠다고 선언하며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버리자 피에트로는 흩어진 돈과 옷가지를 주워 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여기 서 있는 청동상은 실은 프란치스코의 부모를 형상화한 것으로 청동상 옆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

 

“인류에게 아들 성 프란치스코를 (낳아) 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와 피카 부인에게 영원한 감사를 드리는 생생한 표지로 이 기념상을 세운다.”

 

잡으려는 아버지와 떠나려는 아들, 아버지에 게는 아버지의 계획이 있고 아들에게는 아들의 꿈이 있다. 아버지의 세월은 지나갔으나 그에게는 힘이 있고 아들에게는 꿈밖에 다른 것은 없으나 떠나지 않으면 그는 어린아이로 남을 뿐이다. 키에사 누오바 성당 안에는 그가 갇혀 있던 집안의 감옥이 보존되어 있다. 제대 왼쪽, 예수 성심상 옆으로 난 문을 통과하면 프란치스코의 생가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는 회심하기까지 24년을 여기서 살았다. 성당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면 옷감을 파는 상인이었다는 아버지 피에트로의 작업장으로 여겨지는 장소와 당시 길의 흔적이 보존되어 있다. 아마 프란치스코도 이 길을 자주 지나다녔으리라. 벽으로 난 ‘사자(死者)의 문’(porta del morto) 옆에 걸린 테라코타는 어머니 피카 부인의 도움으로 집을 빠져 나가는 프란치스코의 모습을 담고 있다. 프란치스코가 집을 나온 문을 ‘죽은 이의 문’이라고 부른다는 것에 생각이 오래 머무른다. 그는 이 문을 열고 죽은 이들의 세계를 떠났던 것은 아닐 까. 내가 사는 세상은 어떤 곳일까. 일하던 가장이 다쳐 생계가 막막해지자 일가족이 생의 끈을 놓아 버리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 이 핍박받고 한꺼번에 해고되고 스무 명이 넘도록 세상을 버려도 무관심한 세상에서 나는 산다. 이것은 정말 사는 것일까, 혹 우리는 다 죽어 있는 것은 아닐까. 키에사 누오바에서 프란치스코의 집으 로 통하는 문앞에 서자 퍼뜩 그런 생각이 든다.

 

“잠자는 사람아, 일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서 깨어나라/ 그리스도, 그대 위에 빛나시리라.” (에페 5,14)

 

키에사 누오바 광장에서 아랫길을 따라 내려 오면 ‘산타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 성당이 나온다. 전에 아시시의 주교좌였던 이 성당 옆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에서 꼭 기억해야 할 장소인 주교관이 있다.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와 아들 프란치스코 사이에 재판이 있었던 곳. 부자지간에 이런 재판을 벌인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 이런 소송을 건 아버지도 대단하지만 아들 프란치스코의 대응도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재판관인 구이도 주교와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 앞에서 “이제부터 나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아버지라 부를 것입니다.”고 선언한다. 그러고선 돈을 돌려주는 것도 모자라 입고 있던 옷가지마저 다 벗어 버리는 아들이라니! 제 손으로 키워 온 아들이니 아버지는 아들의 성격을 잘 알았으리라. 온 아시시가 떠들썩하게 재판을 건 것은 아마도 미리 강경하게 나가서 아들을 주저앉힐 심산에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들은 단호하게 아버지를 떠난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돈도 옷도 다 돌려주고 완전한 가난을 선택한 것이다. 성인의 생애에서 이 대목에 이르면 ‘적빈’(赤貧)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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