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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년 봄 / 계간 51호
    자비의 희년에 생각해 보는 용서, 그리고 화해 - 서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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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집] 용서, 그대로 주님의 것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
첨부 작성일 2016-06-25 조회 1618

자비의 희년에 생각해 보는 용서, 그리고 화해

용서, 그대로 주님의 것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

 

정리 서상덕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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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빛과 소금의 징표는 무엇일까? 자비의 희년을 지내면서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구체적 실재로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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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용서

지금 생각해 봐도 그를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그에게는 떠 올리기 싫은 고통일 수 있지만….)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희대의 살인마’로 불리던 유영철 (45세)로 인해서였다. 2003~2004년 사이 무려 21명을 살해한 혐의로 2005년 사형을 선고받은 유영철. 그 연쇄살인범을 따 라다니는 이름 가운데 그가 섞여 있었다. 고정원 루치아노 씨 (73세), 그가 주인공이다. 하루아침에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손에 노모와 아내, 4대 독자 등 온 가족을 잃은 사람. 그가 세간을 놀라게 한 건 철천지 원수보다도 더할 법한 유영철을 용서하고 구명탄원서를 냈을 뿐 아니라 두고두고 구명활동을 펼친 사실 때문이다. ‘기자’와 ‘취재원’으로 만나던 10년 전만 하더라도 마음 한 켠에는 도무지 사그라지지 않는 의구심이 똬리를 틀고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게 가능한 일일까?’ 이런 생각은 고 씨를 취재하면서 한동안 나 자신을 괴롭히 기까지 했다. 그저 좋은 게 좋다고, 잘 포장해서 기사거리나 만 들 문제가 아니었던 만큼…. 시쳇말로 진정성 문제가 달린 일이 었던 것이다. 고 씨 관련 기사가 나가면 으레 되돌아오는 피드백은 ‘정말이냐?’, ‘진심인 것 같냐?’는 류의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마치 ‘가까이서 보니 실 제는 그렇지 않지?’ 하고 묻는 투다. 햇수로 12년째 그를 만나고 있다. 그러면서 딱히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고 씨에 대한 의구심이 사라져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인간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다. 누구도 들여다보거나 헤아리지 못했던 그리스도인의 가능성 을….

 

# 용서는 은총

바람 끝이 매섭던 지난 2010년 2월 25일, 사형제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선 고공판이 열린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는 누구 못지않게 졸이는 가슴 을 안고 판결에 귀를 기울이는 이가 있었다. 유영철로 인해 원치 않게 세상에 드러난 고정원 씨는 그날도 어김없이 역사 적인 현장에 함께하고 있었다.헌법재판소장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자 고 씨는 숨죽인 탄식과 함께 얼굴을 떨어뜨렸다. 다시 고개를 든 그의 눈가는 빨갛게 상 기되어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그때 그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번 판결은 또 한 번 저를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선고가 끝난 직 후 만난 고 씨는 물기가 묻어나는 눈으로 대뜸 이렇게 말했다. 뜻밖의 반응에 순간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헌재의 선고 일정이 잡힌 이후 줄곧 가슴 을 졸여왔다는 고 씨. 당시엔 이런 그의 반응이 의외였을 뿐 아니라 온전히 마음 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제 가족이 한 날 한 시에 한꺼번에 사라져버렸을 때도…, 그래서 지옥 같 은 삶으로 추락했을 때도 누구 하나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제가 간절히 바랐던 바는 깡그리 무시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소망은 무시해도 좋다고 여기는 걸까요.” 그가 얘기하는 대로 받아 적고 기사화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마음이 아니라 손이 기사를 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고통을 안 겨준 ‘그 일’에 ‘용서’라는 말은 그렇게 쉽사리 떠올릴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생 각됐다. 아니, 감히 ‘용서’란 말을 들먹일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 속에 숱하게 자살을 시도했던 고 씨. 그런 고 씨에게 ‘용서’는 무엇이었을까? “용서를 통해 한평생 몸의 한 부분처럼 지녀온 생각조차 변화될 수 있음을 체험했습니다.” 그에게 용서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게 한 다리였 던 것이다. 그 ‘다리’는 운명처럼 그에게 전해져 왔다. “스스로는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용서’, 그것은 제게 은총이라는 말 외 에 다른 어떤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 그리스도인의 용서, 존재 그 자체

지난해 12월 13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 주교좌성당인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자비의 희년’ 성문을 열며 “자비의 희년은 하느님 존재와 그분 의 온유한 부성애를 재발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 다.”고 말했다. 아울러 “성문을 여는 것은 기쁨에 로의 초대이고 위대한 용서의 시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힘주어 말한 ‘은총의 때’ 자비의 희년은 용서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인들 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를 통해 하느님께 씻을 수 없는 죄까지 용서받은 존재들이 기 때문이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드러나 는 것처럼 아버지는 언제나 연민과 자비로 끝까지 용서하는 존재다. 태초에 아담이 지은 잘못을 하 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셨다면 오늘의 인류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노아 시대, 모세 시대, 예수 님 시대를 거치며 인류가 끔찍한 죄를 무수히 저 질렀음에도 하느님은 당신의 아드님을 이 땅에 보 내셔서 용서하실 정도로 자비로우신 분이다. 주님 이신 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이 ‘용 서’에서 드러난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 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6, 48)는 예 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 세상에서 실현 불가능 한 것이라면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으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말씀하신 완전으로 향한 길도 가 르쳐주신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 해야 한다.”(마태 18,22)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속죄양 으로 삼아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다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이고 핵심이다. 신·구 약 성경은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를 다양 한 역사와 가르침들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용서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비’야말 로 하느님의 본질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그리 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는 ‘하느님 자비’를 세상에 드러내는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교회가 잠시 망각했던 자비의 개념을 일깨워주고 있다. 교황은 ‘하느님 자비’ 실천을 우리 시대의 요 청으로 받아들이고, 자비 실천이 교회 생활의 토 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상 설교를 통해 자비 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정받는 자격 조건임을 가르치셨다. 또 자비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때 드러난다고 하셨다. 이 시대 빛과 소금의 징표는 무엇일까? 자비 의 희년을 지내면서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구체적 실재로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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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의 열매 ‘화해’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 희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기도’ 중에 바치는 이 청원은 놀라운 것이다. 용서에 대해 알려주는 이 기도는 너무도 중요 한 것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예외적으로 이에 대해 서 거듭 말씀하시고, 산상설교에서는 더 자세히 설명하신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주 님의 은총으로 열렸던 마음이 다시 닫히고 굳어져 서,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이 스며들 수 없게 되 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아버지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도 록 마음이 열리게 된다는 것을 들려준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 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아울러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갈라 5,25) 성령만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똑같은 마음을 갖게 해주실 수 있다는 진리를 전해준다. 즉, 용서가 하느님께로부터 오 는 은총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세례를 통해 죄 사함이라는 크나큰 은총을 체험했고 순간순간 그 은총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버지 를 닮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용서는 하느님의 자녀들과 아버지 사 이의 화해,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기 본 조건이다. 용서로 인해 주님과의 일치, 세상과 의 화해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화해는 용서가 맺는 열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화해의 길

교회 공동체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완성하 는 ‘매정한 종의 비유’는 이런 말씀으로 끝맺는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 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자비는 원수까지 용 서하기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되어 스 승 예수의 모습을 닮게 되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랑이 죄 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순교자들은 세 상에서 이를 재현해 보여준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용서는 그리스도인이 바치는 기도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실은 화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화해는 하나 됨, 곧 일치로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분열을 일삼는 이들의 제 물을 받지 않으신다. 그들을 제단에서 돌려보내시 면서, 먼저 형제들과 화해하라고 하신다. 하느님 께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제물은 당신 백성 들 사이의 평화와 화목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백성의 일치다. 이 일치가 세속적인 눈으로는 불가능해 보일 때가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은 성령 께 우리 마음을 바칠 때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들려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용서에 대 한 유효하고 의심할 수 없는 표징을 교회가 집전 하는 성사들 안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 또한 은총이다. 완고해진 자신을 발견할 때, 그러한 모습에 대해 용서를 청할 때 화해의 길이 열린다. 그 길은 하느님께로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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