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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평신도
  • 2016년 봄 / 계간 51호
    자비의 희년에 생각해 보는 용서, 그리고 화해 - 서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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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배움] 순교영성과 천주가사
첨부 작성일 2016-11-01 조회 1094

인문학 강좌 
순교영성과 천주가사 

김문태 힐라리오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글을 몰라 천주가사를 외우며 천주의 자녀답게 살고자 하였던 신앙선조들의 삶을 되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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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학쟁이들을 모조리 결박하라!” 순식간에 포도군사들이 안방으로 밀려 들어왔다. 나이든 포도군사가 방 가운에 놓인 상을 발로 걷 어찼다. 상이 허공에 떴다가 방바닥에 떨어져 와지끈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 위에 놓였던 등 잔과 나무로 만든 십자고상이 벽에 부딪쳐 튕겨져 나갔다. 뒤따른 포도군사들이 육모방망이로 중년 사내들을 인정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비명과 신음 소리가 뒤엉켰다. 머리가 깨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방바닥은 금세 피로 흥건해졌다. 평 온한 성전이 한 순간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피범벅이 된 중년 사내들이 붉은 오 랏줄에 묶여 마당으로 끌려나왔다. 부녀자들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북풍에 사시나무 떨듯 했다. (중략) 포도군관이 중년 사내들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희들은 군주도 어버이도 모르는 사악한 난신적자들이다. 또한 타국의 세력을 끌어들여 조정을 뒤 집어엎으려 획책한 역적들이다. 대역죄인인 너희들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될 것이다. 할 말이 있 는가?” 최인호 야고보가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 눈이 부어 왼쪽 눈으로만 앞을 볼 수 있었다. 상투마저 풀어 져 긴 머리가 피범벅이 된 얼굴을 반쯤 덮고 있었다. “우리가 왜 난신적자란 말이오? 천주님께서 태초에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니 어찌 임금 중 의 임금이 아니라 할 수 있소? 또한 천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모습대로 만드시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셨으니 어찌 어버이가 아니란 말이오? 그런 분을 주인으로, 아버지로 공경하는 게 대체 무슨 잘못이란 말이오?” 포도군관이 발을 굴렀다. “저런 괘씸한…….” 최인호가 급히 말을 이었다. “또한 우리가 역적이라는 말도 틀렸소.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서로 친애하 며 평온하게 살길 원하오. 그게 왜 나라님의 뜻에 거역하는 일이란 말이오? 나라님은 백성들이 복되 게 살길 바라지 않는단 말이오?” - 김문태의 <세 신학생 이야기> 중에서(바오로딸, 2012)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150주년이 되었다. 한국천주교회는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중국 베이징의 베이탕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전교함으로써 선교사 없이 평신도들의 손으로 자발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1790년에 북 경에 있던 구베아 주교가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조상제사금지령을 내림으 로써 당시의 지도이념이었던 유교와 크게 부딪치게 되었다. 유교식 제사가 우 상숭배의 소지가 있다는 교황청의 결정에 따른 일이었다. 결국 1791년에 천주 교 신자인 전라도의 선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한 뒤 사촌 권상연과 더불어 신 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소위 신해진산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이 폐제분주 사건으로 인해 천주교인들은 유학자들로부터 어버이도 없고 군주도 없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난적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조선말 천주교 와 유교의 만남은 종교·사상의 이질성에 따른 문화적 충격에 그친 것이 아니 었다. 그때부터 천주교는 백여 년간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 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등의 4대 박 해를 거치며 만여 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던 것이다.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세상을 떠난 조상을 살아있을 때처럼 모시고자 하 는 제사를 오해함으로써 이 땅의 전통적인 풍습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셈이었 다. 반면 유교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추원보본의 의례를 부인한 천주교를 서양 의 사악한 이단으로 규정하고 척결한 셈이었다. 하나의 종교·사상이 다른 종 교·사상을 만나 서로 절충하고자 하는 습합(習合)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야기 된 비극이었다. 자신의 이념으로써 상대를 누르고자 하는 압승(壓勝) 형태를 띠 었던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1794년 조선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드린 주문모 신부는 1801년 신유박해 가 터지자 의금부에 자수하여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그 뒤 1836년 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 역시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 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첫 방인사제였던 김대건 신부 는 중국에서 귀국한 직후인 1846년에 체포되어 역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 을 당하였다. 그 뒤를 이어 최양업 신부가 1849년에 귀국하여 11년간이나 숨어 다니며 사목하였다. 앞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를 제외하고 박해시기에 사목 활 동한 유일한 방인사제였다. 최양업 신부는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우리의 정서에 맞는 노래를 통해 이 땅의 신자들을 위한 토착화된 교리교육을 계획하였다. 그는 교화적 효용성 을 높이기 위해 우리의 말과 글로 천주교 교리를 읊은 일련의 천주가사를 높이 평가하였다. 이 땅의 민중에게 널리 알려진 익숙한 시가 장르인 가사에 우리의 말과 글로 된 천주교 교리를 실어 신자들이 더욱 용이하게 교회의 가르침과 신 자의 도리에 눈뜰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천주가사는 오늘날 200여 편 남짓 전해오고 있다. 특히 천주교 박해시기에 창작된 천주가사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이 시기의 천주가사에는 외부의 압박에 대응하여 비신자들에 대한 선교를 염두에 두는 한편, 내부의 결속을 강 화하기 위해 신자들에 대한 교육을 목적으로 한 천주교의 가르침이 첨예하게 드 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사말교리(四末敎理)와 관련한 천주가사는 순 교영성과 긴밀한 연관을 지니고 있어 주목된다. 죽음, 심판, 천당, 지옥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네 가지 마지막 문제다. 사람 은 누구나 죽어야 하고, 현세의 삶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천당이나 지옥으로 가야 한다는 사말교리는 신앙선조들이 용감하게 순교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천주존재, 삼위일체, 강생구속과 더불 어 천주교의 사대교리 중의 하나인 상선벌악을 기반으로 하여 작품화한 것이 바 로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천당강론>, <지옥강론>이다. 이 천주가사들은 현세가 잠시 잠깐 지나가는 풍진세계로서 눈물의 골짜기 이자 귀양살이하는 곳이므로 현세의 즐거움을 탐할 것이 아니라, 사후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선하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참 도리를 몰라 지옥 의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될 세속사람들과 달리, 고향인 천당의 영원한 복락을 생각하며 신자답게 살아야 천주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이 강조 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리서의 다양한 가르침 중에서 현세보다는 죽음 이 후의 내세에 무게 중심을 둠으로써 자연스럽게 당시의 순교영성과 긴밀한 연관 을 지니게 되었다. 비록 글을 모르는 이들까지도 천주가사를 암송함으로써 진리 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고, 온갖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 었던 것이다. 

우리의 신앙선조들은 모진 수난을 당하고 치명하면서 천주를 증거함으로 써 이 땅에 교회가 설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을 다졌다. 그들의 굳은 믿음과 결연 한 의지가 한국 천주교회를 자발적으로 세우고 키웠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의 천주교 신자가 2014년 말 현재 인구의 10.8%인 5,560,971명이고, 성인의 수 가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103위이며, 복자의 수가 124위나 된다는 사실이 결 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성장에 비해 오늘날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는 20.7퍼센트에 불과한 실정이다. 문만 나서면 성당이 있고, 손만 뻗으면 사제를 만날 수 있는 자유로운 시절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글을 몰라 천주가사를 외우 며 천주의 자녀답게 살고자 하였던 신앙선조들의 삶, 그 가르침에 따라 목숨도 초개처럼 버렸던 순교자들의 삶을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8천 명이 넘는 순교자 를 낸 병인박해 150주년이니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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