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보기서울평협 바로가기
> 계간 평신도 > 웹진
계간 평신도
  • 2016년 가을 / 계간 53호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특강: 병인순교와 현대사회의 평신도
    PDF 다운로드
제목 [이야기] 당신 손에 제 운명이 달렸으니 제 원수들과 박해자들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첨부 작성일 2016-10-26 조회 1260

북한생활 체험기2 

당신 손에 제 운명이 달렸으니 제 원수들과 박해자들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시편 31,16)

박정일 주교 마산교구 원로사목자, 전 마산교구장
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드디어 남한에 간다, 신학교에 간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Pyungshindo53_img31.jpg


나의 월남을 도와줄 안내자를 소 개받고 부푼 가슴을 안은 채 집으로 돌아온 나는, 월남을 언제, 어떻게 결 행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계획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좋 은 계획이나 방법이 생각나지는 않았 다. 부모님과 의논할 수도 없는 일이 었다. 왜냐하면 내가 신학교에 들어 가는 것을 강경하게 반대하셨던 부모 님께 월남하여 다시 신학교에 가겠다 는 말은 감히 입 밖에도 낼 수 없는 일 이기 때문이다. 또한 평양에서 백 리 나 멀리 떨어져 있는 벽촌에 있던 나 에게는 상급생 부제님이나 다른 신학 생들과 연락을 하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전연 없는 상태였으니 참으로 고립무원의 신세나 다름이 없 었다. 그러니 항상 나의 성소 문제에 대하여 같이 이야기하며 힘이 되어준 만만한 누이동생만이 나의 의논상대 가 될 수밖에 없었다. 둘이서 치밀하게 짠 계획은 이러 하였다. 해주까지 가는 차표는 여자인 누이동생이 사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청년 남자인 내가 해주 가는 기차표를 사는 것은 월남의 의심을 받을 위험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누이동생의 사진을 한 장 가지고 가기로 하였다. 혹시 도중에 불심검문을 받게 되면 해 주에 이 약혼녀를 만나러 간다는 등 둘러대기 위해서였다.

월남 시도와 실패, 투옥 
드디어 결행의 날이 다가왔다. 1950년 2월 26일으로 기억한다. 부모 님에게는 어디 좀 다녀온다는 말씀만 드리고 집을 떠났다. 기차역에서는 누이동생만이 나를 배웅하였다. 서평 양역이었다. 그때 떠나는 나를 바라 보며 손을 흔들던 동생의 모습이 지 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러나 눈물을 흘린 것 같지는 않다. 해주까지의 주행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여 러 가지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 문인가 빨리 해주에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해주까지의 여행 은 순조로웠다. 불심검문도 없었고, 제일 걱정되 었던 해주역 출구도 무사히 통과하였다. 역을 빠 져나오는 순간, 반은 월남을 성공한 기분이었다. 곧바로 소개받은 교우 집을 찾아갔다. 

Pyungshindo53_img32.jpg


그날 저녁 에는 나를 월남시켜 줄 안내자를 만나지는 않았 다. 단지 다음날 해질녘에(몰래 38선을 넘는 것이니 당 연히 저녁 시간을 택한 것이다.) 어디서 만나기로 했다는 말만 듣고 잠자리에 들었다. 신심이 피곤했던 탓 인지 숙면하였다. 다음날 약속시간이 되어 안내자를 만나 38선 을 향해 해주시 주변까지 말없이 걸었다. 나는 꿈 에 부풀어 있었다. ‘드디어 남한에 간다, 신학교에 간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고 있는 기분이 었다. 약 30분쯤이나 걸었을까, 안내자가 “여기에 볼일이 있으니 잠깐 들렀다 가자.” 하며 어떤 큰 집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이 시간 에 무슨……. 빨리 갑시다.” 하며 독촉하였으나 그 는 이미 어떤 집 앞으로 다가가 문 안으로 들어가 지 않는가. 그런데 내가 영문을 모르고 한걸음 문간에 발 을 내딛는 순간, 문이 닫히고 5~6명의 젊은 보위 부원(북한 경찰관)들이 내 주위에 모여드는 것이었 다. 안내자가 나를 남한이 아닌 경찰서로 안내한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이럴 수가 하는 생각 이 머리를 스쳐가며 한없이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 당시 38선 주변에는 월남 자들을 등쳐먹는 사기꾼 안내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긴 했지만 나에게 그 일이 닥칠 줄이 야…….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경찰들은 나를 무릎을 꿇게 하고 “나쁜 자식!’, ‘남한의 스파이 녀석! 무슨 비밀을 가지고 남한에 가려고 하느냐?” 등 갖은 욕설을 다 퍼부으며 발로 차고 구타하기 시작하였다. 시랑이들 무리에 둘러 싸인 순진하고 무력한 양의 모습인 나 자신이 연 상되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 그러다가 “자 이제 그 만하고 내일 보자.” 하며 나를 좁은 유치장 감방에 넣었다. 나는 “이제 그만하고 내일 보자!” 하는 그 들의 말이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이제 잡혔 으니 신문을 받게 될 때에 무엇을 어떻게 답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보위부원들은 나를 구 타하고 욕을 퍼부었지만 나의 신분과 월남의 동기 및 경위 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오 늘 밤은 자지 않고 밤새 내일 있을 신문에 대비하 여 준비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갑자기 “야, 일어나!” 하는 고함소리에 놀 라 눈을 뜨니 이미 훤히 밝은 아침이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 아무 생각도 못하고 자 버렸으니……. 

구타와 신문, 그리고 석방 
그들은 나를 해주 시내에 있는 ‘38 정치보위 부’ 감방에 감금하였다. 당시 월남하다 잡힌 사람 들만을 취급하는 유치장이었다. 우선 무서운 곳이 라는 인상을 받았다. 수감자들은 교도관들이 다니 는 복도를 등지고 벽을 향하여 계속 침묵 속에 앉 아있어야 했다. 그리고 가끔씩 불려나가 신문과 취조를 받았다. 감방에서 주는 음식은 그야말로 음식이라고 할 수 없는 정도의 것이어서 처음에는 먹을 수가 없었다. 찬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쌀알이 두 세알 밖에 보이지 않는 뜨물 같은 불결한 것이었다. 
처음에 내가 감방에 들어가니까 옆에 앉았던 사람이 무어라고 귓속말 을 거는 것이었다.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점심때에 밥이 먹기 싫거든 나를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러라고 했는데 점심때가 되어 내가 밥을 먹지 않고 그냥 놓았더니 훔치듯이 가져다가 후루룩 먹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2~3일이 지나고 나니 그 밥이 그리 맛있을 수가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니 얼굴은 창백해지고 체중도 많이 줄었다. 

Pyungshindo53_img33.jpg


그러던 며칠 후 나는 불려나가 첫 신문을 받게 되었다. 출생에서부터 해주에 와서 감방에 들어오기까지를 소상히 묻는 것이었다. 나는 묻는데 대하여 사실대로 솔직히 다 이야기하였다. “평남 평원군 동송면 청룡리에 서 태어났고, 무슨 학교, 무슨 학교를 다녔고,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기 도 하였다. 그러다가 사제가 되기 위하여 1948년 9월에 덕원 가톨릭 신학 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1949년 5월에 덕원 신학교가 폐쇄되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사제가 될 수 없어서 사제가 되기 위해 남한으로 가는 길이었 다…….” 거기까지는 내가 진술하는 대로 잘 받아 적었다. 그런데 문제는 해주 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어디서 잤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밖에서 잤다.”고 강변하였다. 숙박한 교우 집을 이야기할 수 가 없었다. “이 추운 겨울에 밖에서 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하면서(3월 초에 해주는 상당히 춥다.) 얼굴을 발로 차며 솔직히 고백하라고 다그친다. 신 문관은 의자에 앉고 나는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교우 집에 서 잤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이야기하라는 강요를 받 으며 “밖에서 잤다.”고 한참동안 실랑이를 하고 나서야,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내가 이야기한 대로 적고 “사실대로 이야기 안 하면 너는 여기서 죽 는다!”고 협박하면서 나를 감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4~5일 후에 다른 신문관이 다시 신문을 하는데 전번의 기록을 읽어가며 재확인을 한다. 그러면 그때마다 “밖에서 잤다.”는 대목에서 이 야기가 진전이 안 되는데, 나는 그때마다 첫 번대로 고집하였다. 그러면 또 한바탕 쥐어박히고 얻어맞아야 했다. 같은 신문을 세 번 받았다고 기억된 다. 마음이 약해졌다. ‘저놈들이 다 알고 있는데 공연히 내가 고집을 부리 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차라리 사실대로 이야기해 버 릴까 하고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4월 말경에 다시 네 번째로 불려나갔다. 그러나 한 번 더 버티 자 하는 심정으로 온 힘을 다해 같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며칠 후에 “박정일!” 하고 부르더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었다.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고향까지의 버스비도 받았다. 

5월 3일이었다고 기억한다. 화창한 날씨에 하늘도 맑았다. 2개월 며 칠만의 출감이었다. 눈이 부시다. 사람들은 얇은 옷을 입고 다니는데 나는 2월 말에 입었던 옷 그대로, 두꺼운 오버 코트에 털모자……. 그러나 지나 다니는 사람들은 힐긋힐긋 보긴 하지만 별로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시대의 해주 사람들은 나와 같은 모습의 사람을 보면 으레 “감 방에 갔던 사람이군!” 하고 치부하였던 것이다. 

감방 친구에게 대세를 주다 
나는 그 길로 해주에 산다는, 나보다 먼저 출감한, 감방 안에서 알게 된 ‘한 대단한 친구’(그런 인상을 받았던…….)를 찾아갔다. 자기의 집이 해주이 니 다음에 출감하면 한번 들리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터라 어렵게 그 친구(!)의 집을 찾아서 그를 만났다. 그런데 뜻밖에, 그는 내가 상상했던 모 습이 아니었다. 허름한 집에 혼자 있는데 건강이 매우 안 좋아 죽음이 멀지 않은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고 나서 대세를 주 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을 믿겠느냐고 물었더니 순순히 믿겠다 고 답을 하였다. 기쁜 마음으로 간단히 4대 교리(세례를 받기 위해 적어도 알아야 하는 4가지 주요 교리, 즉, 천주존재, 삼위일체, 강생구속, 상선벌악)를 설명하고 세례를 주었다. 나는 그 길로 버스를 타고 고향 길을 재촉하였다. 해주에서 고향까지 는, 옛날의 버스길로는 매우 먼 길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숙식을 어 디서 했는지는 지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간에 사리원을 지나면서 그곳 본당을 방문한 기억은 뚜렷하다. 당시 본당신부님이 전 안드레아 신부님 이셨다는 것을 기억한다. 신부님께서는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점심을 사주셨다. 아마 신학생이 월남하다가 고생했다고 측은한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전덕표 안드레아 신부님은 1946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보좌신부로 사 리원본당에 부임하여 연세 높은 본당신부를 잘 보좌하며 북한의 정치보위 부의 감시 하에서 지혜롭게 사목을 하시다가 6.25 발발 후 10월에 정치보 위부에 끌려가 혹독한 전기고문을 받고 살해되어 순교의 길을 걸으신 훌 륭한 사제이시다. 현재 전 신부님은 ‘근·현대 신앙의 증인’으로서 “하느님 의 종 홍용호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대상자 명단에 올라 계신다. 이른 시 일 안에 시복의 영예를 누리시게 되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Pyungshindo53_img34.jpg


“부모님, 죄송합니다!” 
부모님께서는 집에 도착한 나를 아무 말씀 없이 맞아주셨다. 꾸지람 도 야단도 안 하셨다. 나도 해주 유치장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히 말씀드리지 않았다. 본래 우리 가족은, 지금도 그렇지만, 보통 필요한 이야기나 하 고 집안에서 오손도손 이야기를 잘 안 하는 편이다. 후에, 동생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해주에서 체포되었을 때 집에서는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경찰에서 조사가 나오고 아버님이 경찰 에 불려가고 등……. 그때에 부모님이 얼마나 큰 심적 고통을 겪으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사제가 된다고 신학교에 입 학할 때부터 이번 일이 있기까지 부모님께 너무나 많은 고통을 안겨드렸 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월남에 실패하고 해주 ‘38 정치 보위부’에서 2개월 동안의 유치장 생 활에서 풀려나 피곤한 몸으로 고향 집으로 돌아간 것이 1950년 5월 10일 경이었다. 얼마 동안은 막막하여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피곤한 몸을 추 스르며 무료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부모님이나 가족들이 나의 실패나 잘못(!)을 꾸지람하지도 않고 잘 돌보아 주었으므로 마음 편하 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항상 ‘과연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사제의 길을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Pyungshindo53_img35.jpg


세월은 빨리 흘렀다. 6월이 다 가던 어느 날, 6·25 발발 이틀 후, 장 에 가셨다 돌아오신 할아버지께서 “남조선과 전쟁이 일어났단다.” 하시며 기뻐하시는 것이었다. 이제 남조선에서 북한으로 쳐들어올 터이니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공 산치하에서 시달림을 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기뻐하셨다. 사실, 8·15 해 방 이후 북한 신자들은 공산정권의 감시를 받아가며 움츠리고 살아왔다. 우리 집은 숙천읍(평안 남·북도 경계에서 약 40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경부선 역)에서 동쪽으로 8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산골이라 라디오도 없이 바깥소식 에 매우 어두웠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며칠 후 다시 장에 갔다 오신 할아버지께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 고 남쪽으로 계속 남진하고 있대.” 하시고는 “이 공산당 놈들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시며 분개하셨다. 사실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북한 공 산정권이 수립되면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많이 속아왔다. 그들이 줄곧 종교자유, 모든 인민의 평등, 평화를 부르짖었지만 실지는 그와 반대였기 때문이다. 6·25가 발발한 후 1주일이 지나고 10일이 지나면서 인민군이 계속 남진한다는 소문을 들으면서 참담한 심정이었다. 생각하고 믿었던 바와는 전연 다른 방향으로 정세가 흘러가고 있으니……. 또한, 라디오도 없고 신문도 없는 벽촌이라 전세가 어떻게 되어가는 지 알 길이 전연 없어서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다만 유엔군과 국군 이 북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만 듣고 있었다. 

Pyungshindo53_img36.jpg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시작하였다. 이 에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공격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동년 7월 7일 한국에 유엔연합군 파견을 결정하였다. 유엔군 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서울을 수복(9월 28일)하고 10월 19일에 는 평양을 점령하고 계속 북진하였다. 그런데 그때에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대공세를 취하며  남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가끔 미군 군용기가 상공을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 고, 멀리서 들려오는 평양을 폭격하는 폭음소리를 들으면서 전세를 짐 작할 뿐이었다. ‘이제야 공산정권이 끝나고 새로운 미지의 세상이 시 작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부푼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북으로 도주하는 북한 정권이 모든 청년들을, 적령과 상관없이 무조건 강제로, 군인으로 징 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징집을 당해 끌려가다 탈출하다 
경찰들이 불시에 마을을 습격하여 청년들을 체포하여 입대시키곤 하였다. 그때에 나는 체포를 피하기 위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고향 에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외조모 댁에 가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경찰들이 불시에 마을에 들이닥쳤다. 갑자기 숨을 곳 이 없어서 나와 친구 한 사람이 가까운 사과 움에 들어갔다가 붙들리 고 말았다. 그날 밤 우리 둘은 경찰서 유치장에서 묵고 숙천으로 끌려 갔다. 그런데 도중에, 내가 잡힌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아버지께서 끌 려가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귓속말로 “지금 유엔연합군과 국군이 북진 하고 있단다.” 하고 귀띔해 주셨다. 나는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길을 걸었다. 그때가 유엔연합군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였다. 다음날 우리는 영유(숙천에서 약 10 킬로 남쪽)에 있는 어떤 폐광 속에 서 형식적인 신체검사를 받고(당시 징병검사를 할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없었 던 모양이다.) 우리는 모두 북쪽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약 13~14명 정도 였다고 기억한다. 한 명의 경찰이 총을 메고 우리를 압송하였다. 하루 종일 행진하는 동안 만감이 교차하였다. 죽음의 행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귀띔해 주신 말씀을 명심하며 끝까지 끌려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Pyungshindo53_img37.jpg


그런데 다행스럽게 저녁때쯤 되어 내 고향에서 멀지 않은 국도를 지나가게 되었다. ‘내가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으니 여기에서 도망하 지 않으면 앞으로는 도망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으로 도망할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마침 저녁때쯤 되었을 때에 한 우물가를 지나게 되었다. 하루 종일 걸어서 모두 피곤한 터라 “여기서 물 좀 마시고 갑시다!” 하고 우물가에 모여서 물을 마시며 웅성거리는 동안에 어렵지 않게 혼자서 도망할 수가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약 4킬로미터 되는 곳에 이모님 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기회가 좋았다. 이모님 댁에 도착하니 이모님은 깜짝 놀라시며 “지금 동리 청년들이 모두 잡 으러 다니는 경찰을 피하여 높은 뒷산에 올라가 숨어있으니 너도 거기 같이 가있어 라.” 하시는 것이었다. 다음날 새벽 나는 동리 청년 한 사람의 인도로 산으로 올라가 동리 청년들과 함께 피신 생활을 시작하였다. 1주간을 거기에서 지냈다. 밤에는 밭가에 파놓은 작은 구덩이(참호) 속에서 자고, 낮에는 높은 산에 올라가 경찰이 잡으러 오는가 망보는 것이 일과였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우리는 보기 드문 전쟁의 장관을 목격하였다. 갑자기 유엔군 수송기 5~6대가 날아오더니 숙천 앞벌에 낙하산을 투하하는 것 이었다. 낙하한 20여 명의 병사가 지상에 내리자 바로 흰 연막을 치고 총을 쏘며 숙 천읍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약 5분 간격으로 같은 낙하산 투하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는 대포와 지프차를 투하하였다. 수송기들이 우리가 있는 산보다도 낮게 날 고 있었으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어떤 군인의 낙하산 하나가 펴 지지 않는 것을 보았는데 다음 날 하산하면서 나무에 걸려 죽어 있는 병사를 목격할 때에 매우 마음이 아팠다. 다음날 나는 숙천에 사시는 외숙모님을 뵙고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호에 계속>. 

Pyungshindo53_img30.jpg


이전글 삶의 도리와 천주가사 <션죵가>
다음글 안동교구 문경본당 당포공소
      


TOP 위로가기
Copyright ©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All Rights Reserved.

04537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80 (명동2가 1) 가톨릭회관 510호
전화 : 02) 777-2013 / 팩스 : 02) 778-7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