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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평신도
  • 2016년 겨울 / 계간 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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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눔] 향후 교회의 변화와 평신도의 역할2
첨부 작성일 2018-03-23 조회 1309

한국평협 심포지엄2 
향후 교회의 변화와 평신도의 역할2 

정희완 요한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이 글은 지난 9월 9일 인천교구 강화도 갑곶 순교성지에서 열린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 단체협의회 하반기 연수중에 발표한 내용의 후반부로 지난 호에 이어서 연재한다.



2.3. 평신도 교회 직무(lay ecclesial ministry) 

평신도들 역시 예수의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 참여한다. 평신도들 역시 복음화와 성화를 위한 교회의 사도직에 참여한다. “평신도들은 세상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하느님께 부름 받았다”(「평신도교령」, 2항)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처럼, 평신도 역시 사도직을 수행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렇다면 평신도가 수행하는 사도직과 성직자가 수행하는 사도직은 차이가 있는가. 수행하는 방식의 차이인가. 성직자는 주로 성사를 집전하는 방식으로 복음화와 성화 사도직을 수행한다면, 평신도는 생활의 증거와 선행의 방식으로 사도직을 수행하는가(「평신도교령」, 6항). 수행하는 장소의 차이인가. 성직자는 주로 교회 공간 안에서 사도직을 수행하고, 평신도는 교회 밖 세상 안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는가. 그래서 평신도는 주로 가정과 사회 안에서 자신의 사도직을 수행하는가.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직무”(ministry)라는 단어는 성직자와 관련된 단어였다. 그렇다면 평신도는 직무자(또는 교역자 minister)가 될 수 없는가. 교회 안에서 평신도들이 수행할 수 있는 직무는 없는가. 사제 직무, 부제 직무는 있지만 평신도 직무란 없다는 뜻인가. 사실,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의 구분에서 볼 수 있듯이, “직무”라는 용어는 평신도와 성직자간의 차등의 뉘앙스를 풍긴다. 사제와 부제는 교회 안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평신도는 교회 안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의미인가. 한편으로 성직자라는 단어 역시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언어유희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성직자는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인가. 아니면 성직자 존재 자체가 거룩하다는 뜻인가. 직무가 거룩한 것인가. 아니면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거룩한 것인가. 직무는 항상 존재와 인격과 일치되어 수행되는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직무로 불림을 받는 것은 아니다. 직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직 그 이상을 의미한다. 모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직무는 교회에 의해 불림을 받고 교회에 의해 파견되어 공식적으로 복음화와 선교의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시고 파견했다 해서 베드로를 그리스도의 사도라 명명하는데 반해, 교회가 부르고 파견했다 해서 바오로는 교회의 사도라 불리었다는 것은 어떤 시사점을 준다.

통상적으로 교회 안의 평신도 역할을 지칭할 때, “평신도 사도직”(lay apostolate) 또는 “평신도의 소명”(lay voc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평신도의 역할과 일을 교회의 직무와 연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2005년 미국주교회의에서 발행한 “주님의 포도밭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Co-Workers in the Vineyard of the Lord: A Resource for Guiding the Development of Lay Ecclesial Ministry)이라는 문헌에서 “평신도 교회 직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평신도 교회 직무자(lay ecclesial minister)란 어떤 특별한 지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평신도 교회 직무자란 평신도들 사이에서 더 높은 교회 지위를 갖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평신도 교회 직무자를 어떤 특별한 지위의 개념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결국 평신도의 준성직자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평신도 교회 직무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교회의 부름과 파견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복음화와 선교라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상호협력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미국주교회의는 평신도 교회 직무를 공식적인 인준의 절차를 거쳐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평신도 교회 직무자는 공식적인 인준의 과정을 거쳐서 선발되고 파견된다. 
인준의 과정은 대체적으로 개별적인 부르심, 교회의 식별,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적절한 양성의 과정을 수료, 교구장 주교의 인준, 직무를 수임하는 전례예식의 형태로 구성된다. 이러한 형태의 과정을 밟아서 교회가 인준하는 공식적인 직무들을 수행하도록 하는 이유는 평신도 교회 직무가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방식들과는 구별하기 위해서다. 결국, 특정한 직무를 위한 준비와 양성의 과정을 거치고, 주교와 사제와 부제의 사목적 직무에 긴밀히 협조하는 방식으로, 교회 안의 지도자로서 교계의 인준을 받아, 특별한 영역에서 평신도 지도자로 직무를 수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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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한국 교회의 현실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여전히 평신도의 역할이 미미하다. 평신도의 역량의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세계의 다른 지역 교회들보다 성직주의가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교회의 신학적 현실은 보편 사제직과 직무 사제직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입장과 이해의 수준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다. 신앙 감각에 대해서는 송용민 신부만이 천착해서 연구하고 있다. 대중 신심에 대해서는 사회학적, 신학적 관점에서 제대로 연구되지 않고 있다. 대중 신심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담론이 형성되지 않았고 교도권의 구체적인 방향 제시가 부족한 탓인지, 한국 교회의 대중 신심은 기복적 성향을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한국 교회의 평신도 신학자들의 역할도 아직 두드러진 편이 아니다. 물론 앞선 세대의 평신도 신학자인 양한모, 지금 활동하고 있는 평신도 신학자들인 황종렬, 한상봉, 김근수, 주원준, 박문수, 황경훈, 최현순 등은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인 조민아 역시 발군의 신학적 통찰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그들의 역량이 제대로 펼쳐질 수 있는 장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슬픈 일이다. 

한국 교회 안에서 교회 운동들 역시 저조한 편이다. 꾸르실료는 고유한 공동체적 운동이라기보다는 그저 신자 재교육 프로그램 정도로 소화되고 있다. 한국 교회 안에서 그래도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교회 운동은 포콜라레 정도다. 오푸스데이는 한국 교회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 같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다.

평신도 교회 직무에 대한 이해도 낮은 편이다. 물론 사목회의 임원이나 평협 임원 들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인준 형태의 임명장을 수여하는 예식을 행하기도 하지만, 교회 안의 공식적인 평신도 직무로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시골 공소 등 지에 활동하고 있는 평신도 선교사 정도만 교구의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파견되는 형태를 취한다.



3. 교회 쇄신의 방향과 평신도의 역할 

미래 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시간의 흐름은 모든 것을 습관화하고 타성화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교회 역시 관성적이고 타성적인 교회로 변해간다. 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정화와 쇄신의 과정을 갖지 않으면 교회 역시 이기적인 모습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른다는 것은 정화하고 쇄신하는 성령의 힘에 의탁한다는 뜻이다. 교회는 언제나 “우리에게 거짓 안도감을 주는 조직들 안에, 우리를 가혹한 심판관으로 만드는 규칙들 안에, 그리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습관들 안에 갇혀 버리는 것을”(『복음의 기쁨』, 49항) 경계해야 한다.

교회의 바람직한 방향의 변화, 즉 교회 쇄신을 위해 평신도는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신앙과 신학의 영역에서 평신도들 역시 새로운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새로운 상상은 변화와 실천의 단초다. 신앙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신앙이 과연 무엇인지. 신앙을 수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때, 올바른 신앙을 수행할 수 있다. 교회의 사람, 그리스도인,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올바른 가톨릭 그리스도인이 되어 간다. 

교회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교회의 변화를 낳는다.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자신의 문화를 갖고 있다. 교회의 문화를 어떻게 쇄신시킬 것인가. 제도로서의 교회는 구조적 측면을 포함한다. 교회의 구조를 어떻게 복음화와 선교라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열린 구조로 만들 것인가. 

교회의 구성원인 평신도들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신앙과 교회에 대해 새롭게 상상할 것인가. 교회의 문화와 교회의 구조의 변화와 쇄신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가. 여전한 숙제다.



3.1.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상상 

동어반복 같은 어리석은 진술이지만,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교회의 사람이다. 가톨릭 신자란 세례를 통해 가톨릭교회에 소속되고,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가치관을 따르고, 가톨릭 전통을 수용하며, 가톨릭교회의 전례에 참여하는 사람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방식이 가톨릭교회의 방식이라는 의미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같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지만, 그 믿고 따르는 방식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방식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가톨릭교회의 방식이란 무엇인가. 가톨릭 신자에게 가톨릭 신자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가톨릭교회의 고유한 방식이란 무엇인가.

가톨릭 신자와 프로테스탄트 신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교회에 소속되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소속된다.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 교리를 믿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자신들이 속한 교파의 교리를 믿는다.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윤리적 입장을 택하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그들 교파의 윤리적 지침을 수용한다.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의 통공과 가톨릭 전통을 수용하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루터와 칼빈의 전통을 수용한다. 가톨릭 신자는 미사에 참여하고 프로테스탄트 신자는 예배에 참여한다. 결국, 소속과 교리와 윤리와 전통과 전례의 차원에서의 차이인가.

가톨릭의 정체성은 가톨릭교회가 세상과 관여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가톨릭 신자는 가톨릭이라는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가톨릭 종교 생활 안에서 표현된다. 세상 속에서의 가톨릭 신자라는 정체성은 가톨릭적 윤리 원칙들을 따르는 것으로 드러난다. 즉,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가톨릭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며,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가톨릭 윤리 원칙을 준수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결국 가톨릭의 정체성은 주로 신앙과 윤리의 재현(representation) 방식에서 드러난다. 

정체성은 단순히 정태적(static)이 아니라 역동적(dynamic)이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인정한다. 가톨릭의 정체성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행되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기획(project)이다. 또한 가톨릭의 정체성은 하나의 요소를 구성되 었다기보다는 복합적인 요소로 구성되었으며, 정체성의 특성에 대한 규정 역시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해 간다. 예를 들어 가톨릭 전통을 수용하는 사람이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전통을 이해하는 방식과 전통을 수용 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가톨릭 그룹들은 개혁적인 방식으로 전통을 해석하고 수용하며 또 어떤 가톨릭 그룹들은 보수적인 방식으로 전통을 해석하고 수용한다. 그 방식의 차이가 있다 해서 어느 한 그룹이 가톨릭 정체성을 갖지 못한다고 볼 수 는 없다. 또 한편으로, 통념적으로 알려진 가톨릭 정체성의 특성들을 거슬러서 행동하는 신자들이라고 해서 가톨릭 신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많은 자유주의 성향의 가톨릭 신자들은 피임에 대한 가톨릭의 윤리적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때때로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가톨릭의 정체성을 완전히 갖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의미다. 사실, 가톨릭의 정체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특성을 지닌다. 더 나아가 가톨릭의 정체성과 제도적 교회에 대한 헌신은 가끔 충돌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가톨릭 신자라고 말할 때, 우리는 과연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을까. 그들은 과연 우리의 무엇을 보고 우리를 가톨릭 신자라고 부르는 것일까. 우리가 성당을 다니고 있어서? 우리가 믿는 가톨릭 교리 때문에? 우리의 가톨릭 신앙은 오직 성당 다니는 것 으로만 표현되는가. 우리의 가톨릭 신앙은 세상 사람들이 종교적 이념으로 여기는 교리에 대한 충성으로만 표현되는가. 성당 다니는 일과 교리로만 우리가 우리의 가톨릭적 정체성을 드러낸다면 너무 빈약한 것이 아닌가. 신앙은 단순히 종교 생활을 하는 것만이 아니다. 신앙은 단순히 교리에 대한 지성적 동의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어떤 종교적 관습에 익숙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신앙(faith)은 신념(belief)과 태도(attitude)와 행동(action)과 소속되기(belonging)를 포함하는 총제적인 것이다.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은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어 가톨릭적 종교 생활을 하는 것과 가톨릭 교리를 믿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가톨릭적 태도를 취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 형성된다.

올바른 믿음은 올바른 행동을 낳는다. 믿음에서 행동으로 도달하는 과정이 지속되면, 그 속에서 올바른 태도가 형성된다. 가톨릭적 믿음은 가톨릭적 행동을 낳고, 가톨릭적 믿음과 가톨릭적 행동의 지속 과정은 가톨릭적 태도를 낳는다. 태도가 믿음과 행동의 진정성을 담보한다. 태도는 일종의 덕(virtue)이다. 결국 신앙은 덕으로, 즉 태도로 표현된다. 가톨릭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톨릭적 태도는 어떤 것일까. 가톨릭적 태도의 핵심은 사목적인 겸손과 관대함과 포용성이다. 겸손과 관대함과 포용성은 자비의 다른 이름이다. 자기 자신만이 진리를 갖고 있다는 교만과,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품지 못하는 옹졸함과, 진리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타자를 심판하고 판단하고 배척하는 것는 가톨릭적 태도가 아니다. 

사람의 정체성은 여러 요소로 구성된다. 젠더와 민족과 국가와 인종적 요소들이 있다. 남자로서의 정체성, 여자로서의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 백인으로서의 정체성,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다. 그렇다면 일종의 종교적 정체성인 가톨릭 신자로서의 정체성은 성적 정체성, 민족적 정체성, 국가적 정체성, 인종적 정체성, 계급적 정체성을 뛰어넘어 우선성을 갖는가. 가톨릭 신자 간의 연대성이 민족적 연대성과 국가적 연대성에 우선하는가. 가톨릭 신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국가와 민족적 정체성보다 우위에 두고 있는가. 물론 한 개인은 다양한 정체성들을 갖고 산다. 한 개인 안에 가톨릭 신자로서의 정체성,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등이 복합적으로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과 결단의 자리에서 더 고려해야 할 정체 성들이 있다. 그럴 때 가톨릭의 정체성이 항상 우선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가. 즉, 가톨릭 신앙이 항상 우선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가톨릭 신자에게 신앙은 삶의 자리에서 일차적이거나 중심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항상 이차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또는 삶의 한 장식품으로만 작동되고 있다는 반증일 수 있다.

가톨릭 신자에게 신앙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 또한 가톨릭의 정체성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가톨릭 신자들 서로 간의 교회적인 연대(ecclesial solidarity)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러한 신앙의 연대는 이해관계와 이기심과 그릇된 이념에 기초한 집단적 연대와는 구별된다. 가톨릭 신앙에 기초한 교회적인 연대는 가톨릭 신자의 삶의 중요한 요소여야 한다. 물론 이 교회적인 연대가 다른 건강하고 올바른 사회적 연대와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또한 이 교회적인 연대가 그저 신앙의 이름으로 맹목적인 동질성을 추구하고 이기적인 집단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교회적인 연대가 그저 막연한 세계주의(cosmopolitanism)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 교회적인 연대는 삶의 모든 현장에서 신앙을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들의 연대를 뜻한다. 사실 뭐 그리 복잡한 논리가 아닌, 이 교회적인 연대는 신앙 안에서 신앙의 형제자매들의 사정을 살피고 그들과 연대하는 일이다.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은 어떤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가톨릭적 정체성은 열린 모습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해 가는 과정과 수련의 정체성이다. 가톨릭적 정체성은 그저 가톨릭적 관습과 교리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적 정체성은 무엇보다 삶 안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가톨릭적 정체성은 삶의 선택과 결단의 자리에서 신앙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신앙의 연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에 대해 새로운 상상력은 우리를 새로운 모습으로 살게 할 것이다.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끊임없이 깨어 성찰할 때, 신자들은 교회 쇄신의 첫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3.2. 교회 공동체의 문화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공동체 문화 형성 

교회의 본질적 특성의 하나는 교회의 공동체성이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들(people of God)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친교(communion)가 이루어지는 공동체이다. 오늘의 현실 교회는 이 교회의 공동체성을 제대로 실현하는 모습으로 서 있는지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과 반성 역시 신자가 해야 할 교회 쇄신의 출발점이다.

무엇이 공동체인가. 공동체를 공동체 되게 하는 구성 요소들은 무엇인가. 첫째, 공통의 목표와 지향과 신념과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이념 공동체다. 가톨릭 공동체는 당연히 가톨릭 신앙과 윤리와 가치를 공유하는 종교 공동체다. 둘째, 구성원들의 시간과 공간이 전면적이든 부분적이든 공유되어야 한다. 일상과 삶을 나누는 일종의 생활 공동체다. 가톨릭 공동체 역시 대부분 본당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부분적으로 시간과 삶을 공유하는 생활 공동체다. 셋째, 구성원들이 호혜성 (reciprocity)을 바탕으로 공감과 연대를 이루는 것이다. 일종의 정서적 공동체다.

가톨릭교회의 기초 핵심 조직인 본당과 교구 공동체는 과연 종교적 이념 공동체로서, 생활 공동체로서, 정서적 공동체로서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본당은 그저 주일 전례만 참여하는 곳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본당 안의 소수의 적극적 활동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본당 신자들에게 본당은 그저 미사 참여하는 공간, 단순한 전례 공동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과연 신자들이 본당 안에서 복음화와 성화라는 목표를 지향하며 신앙과 윤리의 가치를 진정으로 공유하고 있는가. 또한 오늘날 본당은 생활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 신자들은 점점 본당을 매개로 일상과 삶을 나누지 않는 것 같다. 한국 교회에서도 일상과 삶의 중심 매개로서의 본당의 역할은 1990년대까지인 것 같다. 21세기에 들어서 한국의 본당들 역시 생활 공동체의 기능을 점점 상실해 간다. 생활 공동체로서의 기능이 점점 약화되는 현상은 당연히 정서적 결속의 힘도 약화되는 현상과 맞물려 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본당에서 어떤 소속감을 잘 느끼지 못한다. 이것은 신자들이 본당 공동체보다는 가톨릭 액션 단체와 새로운 교회 운동들에 더 많이 이끌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자들은 본당 밖의 교회 운동들에서 오히려 소속감과 정서적 연대를 느끼며, 개성화(individuation)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은 그 공동체에 소속됨으로써 갖는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공동체를 통해 사람들은 어떤 정서적 충족, 즉 인정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인간은 물질적 만족뿐만 아니라 자기 존엄을 추구하는 존재다. 인간의 자아의 형성과 자아실현은 타인의 인정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얻고 그를 통해 자긍심을 획득하지만, 무시에 의해 자긍심이 훼손되었을 때는 투쟁하는 ‘인정투쟁’의 과정이다.” 이러한 인정은 사랑과 권리와 연대로 표현된다. 타인으로부터 사랑 받음을 통해, 타인 으로부터 자기 권리의 인정을 통해,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한 개인은 자아를 완성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모든 공동체는 그 나름의 인정 체계를 갖고 있다. 교회 공동체 역시 그 나름의 인정 체계를 갖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급격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인정 체계 덕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 인정 체계는 당대의 사회 인정 체계와 달랐다. 계급과 성별과 인종의 차이 따라 인정의 방식 이 차이가 나는 사회 인정 체계와는 달리 그리스도교 인정 체계는 평등 체계였다. 모든 구성원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평등하게 인정받는 인정 체계였다. 물론 실제 현실의 교회 공동체에서 인정 체계가 어떻게 작동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교 교회 공동체는 이상적인 측면에서 평등 인정 체계를 표방하고 추구하는 공동체였다. 교회의 이러한 평등 인정 체계는 세상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보여졌고,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되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 공동체 안에는 과연 그러한 평등 인정 체계가 작동되고 있는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평등한 상호 인정 체계 안에서 소속감과 정서적 유대를 느끼고 있는가. 자본주의 인정 체계는 자본을 통해 인정의 차이가 드러나는 사회다. 물론 여기서 자본이란 물적 자본뿐만 아니라, 권력과 지위를 통한 상징 자본도 포함된다. 자본주의는 가진 것을 토대로 인정의 차등이 이루어지는 체제다. 문제는 오늘의 교회 역시 이러한 자본주의 문화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는 점이다. 교회 공동체 안의 모든 이들은 형제이며 자매라는 평등 인정 체계를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 현실 교회 안에서는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적 인정 체계가 작동되고 있다. 세속의 자본과 권력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더 많이 인정받고 있는 현실이다. 특히 교회 인정 체계에 있어서 인정의 권력을 가장 많이 행사할 수 있는 성직자들이 오히려 더 세속의 인정 체계를 따르고 있다. 물론 세속의 인정 체계와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다. 또한 그래도 아직은 교회 공동체 안에는 평등 인정 체계를 지향하려는 노력이 있다. 하지만 현실의 교회 공동체는 점점 세속 자본주의 논리와 인정 체계에 물들어 가고 있다. 이것 역시 슬픈 현실이다. 이 시대의 신자들은 오늘의 교회가 다시 한 번 원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인정 체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쩌면 이러한 노력이 교회 쇄신을 위해 이 시대의 평신도들이 해야 할 역할의 하나일 것이다.

구성원들이 소속감과 정체성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로 복귀하기 위해, 고유한 평등 인정 체계를 지닌 그 원래의 교회로 회복되기 위해, 신자들의 많은 노력들이 요청된다. 또한 교회 안에 침투한 자본주의 논리 때문에 발생하는 문화적 왜곡 현상들, 즉 교회 안의 물신 숭배 풍조, 기복적이고 이기적이고 상업적인 교회 문화들, 여전한 교회 안에서의 성차별의 문화들, 살아있는 신앙의 말들이 아닌 추상적이고 교조적인 종교적 관성의 언어들만 난무하는 현상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늘 성찰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 올바른 신앙의 문화를 어떻게 형성하고 구축할 것인가. 이 또한 여전한 숙제다.



3.3. 교회 구조의 변화 촉진과 교회 운영에 참여 

제도로서의 교회는 현실 속에서 복음화와 선교를 지향하기보다는 제도의 유지와 관리에 치중할 위험이 있다. 제도와 조직은 그 본성상 변화를 지향하기보다는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습성이 있다. 세상의 모든 제도가 갖는 치명적인 한계다. 따라서 제도로서의 교회 역시 끊임없는 쇄신의 과정에 있어야 한다. “교회의 관습과 행동 양식, 시간과 일정, 언어와 모든 교회 구조가 자기 보전보다는 오늘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적절한 경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목 쇄신을 요구하는 구조 개혁은 이러한 의 미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27항)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진술은 교회 구조의 지속적인 변화와 쇄신에 대한 분명한 요청이다.

교회 안의 제도와 구조의 변화와 쇄신은 단순히 제도와 구조의 민주화라는 맥락에서 접근할 수는 없다. 세상의 모든 제도와 구조는 민주화(democratization)라는 방향으로 움직여 가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명제다. 하지만 교회의 제도와 구조의 변화와 쇄신의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교회는 제도로서의 교회라는 차원도 있지만 신비로서의 교회는 보이지 않는 차원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의 제도와 구조의 변화와 쇄신은 단순히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구조의 형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제도와 구조는 끊임없이 변해 가야 하지만, 새로운 제도와 구조 역시 시간 속에서 생동감을 또 다시 잃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구조라 하더라도 그 구조에 생기를 주고 지탱하고 평가하는 생명이 있을 때에만” (『복음의 기쁨』, 26항) 복음화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드러난 교회 제도와 구조의 변화와 쇄신의 방향은 단체성(collegiality)과 공동합의성(synodality)라는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이 개념들은 교회 통치에 있어서 주교들의 태도와 입장에 관한 개념들이다. 하지만 단체성과 공동합의성의 정신은 교회 구조 전반에서 실현될 필요가 있다. 단체성과 공동합의성에 대한 공의회의 강조는 교회의 모든 제도와 구조가 대화와 협력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교회의 제도와 구조는 대부분 성직자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더 나아가 교회의 통치와 운영 역시 성직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교회를 통치(rule)하고 다스리는 (govern)는 일은 주교의 임무다(「교회헌장」, 8항). 그렇다면 교회의 통치권(governance)에 평신도는 참여할 수 없는 것인가. 성직자의 통치와 다스림에 협력하는 방식으로밖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없는가. 통치와 다스림이라는 개념은 어쩌면 세속의 개념이 교회로 유입된 것인지도 모른다. 교회의 모든 행위는 섬김(service)을 지향해야 한다. 통치와 다스림의 개념이 교회에 들어온 것은 운동(movement)으로서의 교회에서 제도와 구조로서의 교회로 변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성직자 중심의 교회의 통치와 운영은 직무 사제직과 리더십과의 관계를 오랫동안 오해해서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직자로서의 서품이 보편 사제직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직무 사제직이 보편 사제직보다 위계적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구별될 뿐이다. 비록 본질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교회법과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직무 사제직을 수행하는 성직자들은 분명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이다. 하지만 성직자가 교회 공동체를 이끄는 것은 위로부터(from above)가 아니라 공동체 안으로부터(from within) 이다. 또한 성직자의 리더십은 세속 권력의 관점에 말하는 “지배를 의미하는 권력”이 아니라 복음화를 향한 봉사의 리더십이다. 성직자로의 서품은 위계적 승진이 아니라 섬기는 지도자로서 신자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는 것에 대한 교회의 인정(recognition)이다.

제도로서의 교회의 통치와 운영에 평신도들의 협력과 참여가 요청된다. 물론 영적 지도와 성사의 집전에서 성직자의 우선성은 인정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법적 통치의 문제에 있어서 성직자의 권한과 역할은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회의 운영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역할이 요청된다. 교회의 통치와 운영에 있어서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권력관계를 통한 지배구조는 언제나 쇄신되어야 한다. 잠정적 대안으로는 “성직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평신도들과 공유함으로써 평신도의 교회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그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교회를 운영할 수 있다. 일종의 협력적 성직자 중심주의다.”

사실 교회 구조의 변화와 쇄신에 대한 목소리는 언제나 있어 왔다. 문제는 과연 누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가이다. 성직자들의 반성과 성찰이 먼저 요청된다. 하지만 또한 평신도들의 지속적인 예언자적 목소리 역시 당연히 요청된다. 반성과 성찰, 그리고 새로운 예언자적 요청들이 교회 제도와 구조의 변화 쇄신의 실천과 실현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나가는 말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오직 성령만이 아신다. 성령께서 교회를 이끄신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당신이 이끄시는 교회의 변화와 쇄신의 길에 우리들이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신다(call). 교회의 변화와 쇄신에 참여한다는 것은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의미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신다.

지상의 교회는 세상 안에 있다. 세상 안에 있는 교회는 세상과 영향을 서로 주고 받는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사명이 있다. 교회는 세상의 복음화를 겨냥한다. 하지만 세상 역시 교회에 영향을 미친다. 올바른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aggiornamento)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우리는 토착화(inculturation)라 부른다. 세상은 교회에 건강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세상은 자주 교회를 세속에 물들게 한다. 부정적인 맥락에서의 세속화(secularization)다. 오늘날의 현실 교회는 과연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세속에 물들어 변해 가고 있는가. 교회 안의 일들에 평신도들의 다양한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다. 하지만 교회 안에 점점 자본주의의 논리가 내재화되는 현상은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다. 한국 교회는 아직도 많은 부분 세계 교회의 흐름과는 달리 평신도의 교회 안의 일들에 대한 참여가 저조한 편이다. 그 반면에 자본주의 물질주의 경향은 세계의 다른 지역 교회들보다 더 강한 편이다. 이렇게 말하면 한국 교회의 현실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안에 평신도의 등장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보편사제직의 중요성과 평신도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신학적 전망의 제시는 공의회 이후의 교회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공의회 이후의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신앙 감각과 대중들의 신심 속에 숨어 있는 복음화의 힘들을 재발견했다. 또한 본당과 교구의 경계를 뛰어넘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 운동들은 복음화를 위한 평신도의 역량을 새롭게 형성 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공의회 이후 교회는 교회 안의 직무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발전시켰다. 직무(ministry)는 복음화와 선교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 직무자(minister)는 “지배나 영예를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을 섬기고 사목 임무를 다하도록 온전히 봉헌”(「사제 양성 교령」, 9항)된 사람이라는 것을 교회는 깨달았다. 직무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교회 안의 평신도 직무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직무는 권력과 지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화와 선교를 위해 있는 것이며, 교회 안의 순서(order)는 서열이 아니라 친교를 위해 있는 것이다. 교회의 직무가 갖는 본질적 방향성과 그 특성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교회의 직무를 맡은 사람과 맡지 못한 사람 사이에 존재적 위계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가 지배와 서열의 관계가 아니라 봉사와 친교의 관계임을 알게 될 것이다. 성직과 평신도의 관계를 우리는 오랫동안 오해해 왔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복음화는 세례 받은 모든 이의 주도적인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복음의 기쁨』, 120항)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언하고 있다. 이 시대의 평신도의 모습에 대해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교회의 많은 지체들은 그들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기를 바라고, 자신들에 적합한 방식으로 교회 생활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본당과 여러 단체와 운동을 통하여 스스로를 조직하고 교회를 세우고,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며, [인터넷의] 사회 매체를 통하여 다른 신자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의 접촉을 추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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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선구자적 평신도들이 위의 진술처럼 행동해 왔고, 교회 안에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 왔다. 이 시대의 모든 평신도들 역시 교회 안에서 그저 수동적인 수용자로만 서 있어서는 안 된다. 세상 안에서의 평신도의 고유의 역할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자신들의 역할과 권한이 있음을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올바른 방향의 변화와 쇄신의 노력들에 있어서 평신도들이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한 노력이 성직자들의 몫만이 아니다. 교회의 구성원 모두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교회의 올바른 방향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 평신도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에 대해, 성직자와 평신도의 이상적인 관계에 대해, 이러 이러 해야 한다는 당위적 요청에 대해 그저 목소리만 소리 높여 외치면 되는가. 현실 속에서의 실현과 실천 가능성을 생각하면, 많은 이상적이고 당위적인 것을 말한다는 것이 헛된 것이라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변화의 시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에서 출발한다. 교회의 모습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 교회의 직무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 평신도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 교회 안의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이 향후 교회의 변화와 쇄신의 시작이 될 것이다. 변화와 쇄신의 시작은 교 회 주체의 각성을 요청한다. 변화의 기미를 내포하는 기존 현상의 균열은 신앙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신앙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란 끊임없이 교회와 신앙에 대해 공부하고 성찰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이 현실화되고 지속되기 위해서는 여럿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은 개인적 차원에서보다 공동체적 차원에서 더 강력한 현실화와 지속성의 힘을 갖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을 공동체적 차원에서 현실화하고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함께 행동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응답하는 기술을 터득해야 하는데, 그 과정은 매우 어려우면서도 분명한 해답조차 없는 형극의 길이며, 흔히 파괴 적인 결과로 이어”24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많은 운동들이 처음과는 달리 변질 되기도 하고 소멸의 길에 이르기도 하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인지도 모른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서 좌절하지 않는 더 많은 노력과, 성령께 더 많은 기도가 요청되는 이유다.

 

당대를 읽기가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신앙인으로서 복음적 가치를 지키며 복음적 방식으로 살아가기가 아주 어려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간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그저 소비의 행위로 전락하게 되는 자본주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간다. 세상의 체제들은 억압적 형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유혹의 방식으로 접근한다. 더 이상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 교묘하고 복잡한 시대에 참다운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공부해야 한다. 참 공부란 끊임없이 질문하고 성찰하는 방식의 공부다. 끊임없이 교회의 모습과 신앙의 삶에 대해 다양한 각도와 관점에서 성찰하고 공부해야 한다.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만 변화의 기미는 공부에서 시작된다. 공부를 통해 신학적 성찰의 힘과 신앙의 감각을 성장시켜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세월이 쌓여갈수록 교리 지식과 전례에는 점점 익숙해져 간다. 하지만 정작 그리스도교적 삶의 방식을 살아내는 데는 진전이 없거나 더딘 것이 아닌지 늘 경계하고 성찰하면서 신앙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성찰과 공부, 그리스도교적 삶의 방식을 살아내는 것이 참 영성이 아닐까. 교회의 변화와 쇄신이 신자들의 각성과 성찰과 공부에 달려 있다고 말하기가 참 어처구니없고 미약한 것처럼 보인다. 변화와 쇄신을 위한 뚜렷하게 효과적이고 기발한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삶의 진실은 언제나 단순한지도 모르겠다. 성찰적 신앙과 깨어 있는 신앙인들만이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조금씩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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