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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년 겨울 / 계간 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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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야기] 당신 손에 제 운명이 달렸으니 제 원수들과 박해자들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시편 31,16)
첨부 작성일 2018-03-23 조회 1141

북한생활 체험기3

당신 손에 제 운명이 달렸으니 제 원수들과 박해자들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시편 31,16)

 

박정일 주교 마산교구 원로사목자, 전 마산교구장

 

구름 같은 피난민 행렬은 길도 없는 넓은 평야 논밭을 걸어야 했다. 국도는 군인들의 몫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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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박정일 주교

 

고향 집에 도달한 것은 10월 말 경이었다고 기억한다. 인민군이 도주하고 공산당이 물러난 고향 마을은 평화로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조용한 마을의 분위기와 마음의 평화였다. 그러나 나는 UN군이 점령한 평양의 상 황이 어떠한지, 그리고 특히 동료 신학생들과 신학교에 관한 소식이 궁금하여 마냥 무료하게 시골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평양으로 달려갔다. 때는 11월 중순경이었다.

 

그런데, 평양에서 며칠 동안 머물고 있는데 갑자기 많은 피난민들이 평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중국 공산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침하므로, 북진하던 UN 군은 후퇴하고, 따라서 많은 피난민들도 남하하여 평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에 이미 대동강 철교와 인도교는 모두 폭파되어 대동강을 건널 수가 없었으므로 피난민들은 대동강변에서 우왕좌왕 아비규환의 대혼란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남하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많은 사람이 대동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수심이 얕은 곳에서 옷을 벗고 건넜는데 동사한 사람이 많았다고 들었다. 12월 초의 평양 날씨는 매우 춥다.

 

 

친필 쪽지를 주신 몬시뇰 캐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몹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의 안위 때문이었다. 필시 가족들도 피난길에 올랐을 터인데, 수만 명의 피난민이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는 이곳에서 알고 있는 집도 없고, 어디서 만나기로 한 약속도 없고….

 

2~3일을 고민하며 기다리는 가운데, 하루는 관후리성당(낯익은 옛 평양교구 주교좌성당)을 찾아갔다. 거기에서 몬시뇰 캐롤(메리놀 외방선교회 선교사, 한국 명 안 주교, 당시 평양교구장 서리)을 만났다. 미 제8군 군종신부로 참전하고 계셨다. 신학생인 나를 반가이 맞아주셨다. 월남을 도와주시기 위해 영문 쪽지 한 장을 주셨다.

 

“To whom it may concern….” 즉, “이 사람은 그리스도 신자인데 가능하면 편의를 봐 주시면 고맙겠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안 주교님께서는, 군종사제로서 바쁘신 가운데도, 나에게 주신 그런 쪽지를 수십 장 친필로 써서 만나는 평양교구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다고 한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시다.

 

당시 수복된 평양에는 윤공희 대주교님(은퇴하신 전 광주대교구장, 당시는 차부제)과 ‘내가 잘 알고 있던’ 군종신부로 파견된 두 분의 평양교구 신부, 그리고 현재 서울대교구 은퇴 사제인 김득권 신부(본래 평양교구)가 있었지만 그때에는 만나지 못하였다.

 

다음날 나는 ‘이 상황에서 도저히 가족들을 만날 수도 없고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으니 혼자서라도 월남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대동강 변 연광정(練光亭) 앞에 나갔다. 거기에서 미군 지프들이 운집한 피난민 가운데를 헤치고 대동강 위에 놓여 있는 부교(浮橋)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 ‘안 주교님께서 주신 이 쪽지를 가지고 저 지프를 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인파를 헤치고, 한 지프에 다가가 운전병에게 쪽지를 보였더니 잠깐 훑어보고는 그냥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지프에 시도하였더니 타라고 한다. 지프가 대동강을 건너는 데는 5분도 안 걸렸다. 남쪽 강변(선교리) 모래사장에 도착하여 내리라고 한다. 구사일생이라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뛰어 내리면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한 것 같다. 12월 4일 정오쯤이었다. (12월 4일은 UN군이 평양을 포기한 날로 기록되어 있다.) 나는 지금도 편하게 평양을 탈출한 그 당시를 회고할 때에 ‘그 혼란 속에서라도 좀 더 부모님과 가족들을 기다렸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과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 때가 가끔 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우리 가족은 어느 날 저녁식사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총소리가 나고 중공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빈손으로 피난길에 올랐었다. 부모님을 위시하여 두 형님과 형수님들, 3명의 여동생과 조카들까지 합하여 10명의 대식구였다. 어렵게 평양까지 도달하였으나, 강을 건널 수가 없어서 대동강 상류로 올라가 얕은 곳에서 옷을 벗고 건넜다고 한다. 그 후 월남에 성공한 것은 부모님과 여동생 셋뿐이다.)

 

 

맨발로 남으로 남으로 걷다

 

지프차에서 내린 나는 날 듯한 기분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다만 남으로, 남으로…. 빨리 걸었다. 구두가 작아서 맨발로 걸었다. 저녁때에 도착한 곳이 중화(원주교구 초대 교구 장이었던 지학순 다니엘 주교님의 고향)라는 작은 읍이었다. 성당을 찾아갔는데 피난민들이 꽉 차 있었다. 피난 때에 천주교 신자들은 어디를 가나 성당에서 숙식을 해결하곤 하였다. 불편한 가운데서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하며 잘 지냈던 것 같다. 다행히 거기에서 잘 알고 지내던 열심한 교우 가족을 만나 함께 걷게 되었다. 두 자매와 어린이 셋, 그리고 나 5명이 함께 걸었는데 꼬마 하나를 업고 걷는 것이 내 몫이었다.

 

구름 같은 피난민 행렬은 길도 없는 넓은 평야 논밭을 걸어야 했다. 국도는 군인들의 몫이고…. 저녁때가 되면 아무 마을에나 들어가서 빈 집을 찾아 들어가 먹고 자곤 하였다. 주민들이 피난을 떠나서 많은 집들이 비어 있었고 남기고 간 음식물도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서 먹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약 1주간을 걸어 38선에 위치하고 있는 해주시 입구에 다다랐다. 거기에서 우리는 참으로 전쟁의 비참한 모습을 목격하였다. UN군 공군의 폭격과 총격으로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들이 많이 사망하여 도로 위와 주변 논밭에 시체들이 수도 없이 많이 널려 있었다. 그런데 어떤 할머니가 그 시체들 가운데를 다니며 시체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둘러보고 있지 않는가. 아마도 자식이나 가족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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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철교를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피난민들.


김충무 신부님과 38선을 넘다

해주에 도착한 우리는 해주성당을 찾아 들어 갔다. 예측한 대로 피난민들이 초만원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38선으로 나갔는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피난민들이 38선을 넘지 못하고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국군들이 월남하는 피난민들이 38선을 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국군과 UN군이 북진하고 있으니 월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돌려 북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그때에 우리는 사제복을 한 어떤 신부님(김충무 클레멘스)이 국군과 “사제로서 남한으로 가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김 신부님은 본래 연길교구 사제인데 평양 홍용호 주교님의 요청으로 평양교구에서 약 7년간 사목하시다가 나와 같은 시기에 피난길에 오르셨던 것이다. 그 후 신부님은 마산교구 진해 중앙본당(당시는 부산교구) 제5대 주임으로 사목하셨다.

 

나와 동행하던 자매들이 그 상황을 보고 나에게 “신학생은 신부님께 부탁하여 함께 월남하라.” 고 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며칠 동안 어려운 피난길을 함께하였는데 혼자 따로 헤어지는 것이 미안하여 “상황을 좀 두고 보자.”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자매들이 계속 권하기에 “그럼, 말씀이나 드려보지요.” 하고 신부님께 말씀드렸더니 신부님께서 흔쾌히 허락하시어 신부님과 동행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월남하여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약 2년 후에는 로마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자매들의 소식을 전혀 알 길이 없어 매우 아쉽다.)

 

김 신부님과 우리 일행은(신부님과 신부님 가족, 수녀 지원자 2명, 그리고 나, 모두 5명) 무사히 38선을 넘어 남하를 계속할 수 있었다. 수녀 지원자 2명은 월남하여 두 분 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회 수녀가 되었는데 지금은 다 천당에 가셨지만, 생전에는 내가 부산을 방문할 때마다 피난 때의 추억을 나누곤 하였다.

 

이틀을 걸어서 우리는 임진강 하구에 도달하였다. 거기에도 대동강 변보다는 훨씬 적었지만,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있었는데 몇 척의 배가 돈을 받고 피난민들을 건너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일행이 배를 타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얕은 곳이 있어 벗고 건널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신부님께 “혼자서 상류로 가서 옷을 벗고 건너겠다.”라고 말씀드렸다. 신부님께서는 잘 생각했다고 흔쾌히 승낙하셨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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