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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평신도
  • 2017년 봄 / 계간 55호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특강: 병인순교와 현대사회의 평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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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집]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첨부 작성일 2017-04-14 조회 1027

한국평협 창립 50주년 맞이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서상덕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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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7월 23일. 대전 대흥동주교좌성당. 
당시 전국 12개 교구 가운데 원주교구를 제외한 11개 교구 평신도 대표와 8개 단체 대표 등 27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의 전신인 ‘한국가톨릭 평신도사도직중앙협의회’가 창립총회를 열고 한국 교회 안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역사적 장면이다. 한국 교회 속에서 한국 교회와 함께해 온 지 반세기. 이 땅의 평신도들은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가. 역사는 기억의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역사는 우리들 가운데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분에게 다가가는 길이다. 한국 교회 역사는 평신도의 손을 빌린 하느님의 역사하심이다. 평신도를 통해 당신의 뜻을 펼쳐오신 주님의 여정을 열두 마당으로 나눠 연재한다.

「하느님 얼굴을 보는 길」 
누구도 
하느님 얼굴을 본 사람 없습니다 

살아,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하느님, 당신 얼굴을 뵐 수 있다면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주님 얼굴 말갛게 
당신에게 미소 지을 것입니다 

서로 화해하십시오 
화해보다 큰 사랑은 없습니다 

화해의 찰나 
자비의 주님 얼굴 맞대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 자비의 얼굴 만나는 길 
참으로 쉽고도 힘겹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걸어가야 할 길임을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신 얼굴임을 믿기에… 

이제 다시 한 마음으로 
주님 당신 얼굴 만나려 
나서고자 합니다

1. 첫째 마당 - 평신도들의 손으로 마련한 한국 교회 초석 
정조 7년(1783년). 영조의 부마 황인점이 동지 사 겸 사은사로 청나라 수도 연경(燕京: 지금의 북 경)에 간다는 소식이 세간에 전해졌다. 그의 연경 행에는 사행의 기록을 담당하는 서장관(書狀官)으 로 이동욱(李東郁)이 동행키로 결정됐다. 당시 개인이 국경을 넘거나 북경에 가기는 거 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매년 한 차례씩 이 뤄지는 동지사 파견은 국가 간 무역의 통로뿐 아 니라 문화의 이동 경로로 중요성을 띠었다.

정약용의 누이(妹)를 아내로 맞은 이가 이동욱 의 아들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었다. 그런 그 에게 사촌이자 사돈 관계인 이벽이 찾아왔다. 
“이번에 자네가 북경에 들어가게 된 것은 참으 로 하늘이 우리들에게 성교(聖敎)의 참된 뜻을 가 르치고자 하시는, 천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 는 좋은 기회일세. 이 교리만이 성현의 도(道)이 며, 만물(萬物)을 만들어낸 주인인, 오직 하나뿐이 고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천주에게 봉사하는 참 된 교(敎)이므로 구라파 사람들은 이것을 가장 높 이 받든다네. (중략) 이번 자네가 북경으로 가게 된 것은 참으로 천주께서 우리 이 작은 나라를 불 쌍히 여기사 우리를 구하고자 하시는 섭리네. 북 경에 들어가거든 곧 천주당에 가서 구라파의 교사 (敎師)를 만나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물어서, 교의 (敎義)의 깊고 참된 뜻을 밝히며, 천주교리의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피고, 또 필요하고 중요한 교리 에 관한 책을 모두 가지고 돌아오게. 인간이 죽느 냐 사느냐, 그리고 영원토록 행복하느냐 불행하느 냐가 달린 큰 문제가 자네 손에 매여 있으니, 경솔 히 행동하지 말고 몸가짐을 특히 주의하게.”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천주교 교리에 밝지 못 했던 이승훈은 이벽의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한다. 그때부터 이승훈은 교리서적을 얻어 읽고 기뻐하 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겠다고 결심한다. 1783년 음력 10월 14일. 이승훈은 아버지인 서 장관 이동욱을 따라 서울을 떠나 북경으로 향한 다. 12월 3일 심양(瀋陽: 지금의 봉천)을 거쳐, 12월 21일 드디어 북경에 도착한다. 그 후 그에게 주어 진 40여 일의 시간은 한국 교회는 물론 보편교회 의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분수령이 된다. 친구 이벽의 부탁을 떠올린 이승훈은 북경에 머무는 동안, 당시 프랑스에서 온 예수회 신부들이 맡아 사목하던 ‘북당’을 자주 찾아갔다. 그는 외 국인 신부들과 필담(筆談)을 통해 교리를 배우고 세례 받을 준비를 해나갔다. 난생 처음 만나는 이 국의 사람들이지만, 하느님의 진리를 향한 불타오 르는 열정은 모든 장벽을 허물어냈다. 한문을 빌려 오가는 필담이었지만 주님께서 열어 보여주시는 진리에 다가설 때마다 북받치는 감동이 함께한 이 들을 휘감았다. 동지사 사행이 다시 본국으로 출발하기 며칠 전 인 1784년 음력 정월 그믐께(양력 2월 하순경), 이 승훈은 북경의 북당에서 드 그라몽(Louis de Grammont: 예수회)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조선 교 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 을 받았다. 당시 북경에 있던 예수회 관구장 드 방따봉(de Ventavon: 汪達洪) 신부는 이승훈의 세례 소식을 프 랑스에 있는 친한 벗에게(1784년 11월 25일자) 이렇 게 알렸다.

“아직 어떠한 성직자가 한 사람도 발을 들여놓 지 못한 한 왕국에서 복음의 빛을 빛나게 하기 위 하여, 천주께서 쓰시려고(使用) 하신 바 한 사람이 개종(改宗)하게 된 이야기를 그대는 위안과 즐거움 으로써 들으리라고 믿는다. 그 왕국은 중국 동쪽에 있는 반도의 나라 조선이다. (중략) 작년 겨울에 들 어온 조선의 사절과 따라온 사람들이 우리 성당을 구경하러 왔으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종교 서적을 주었다. 그들 중 나이가 27세로 귀족의 아들이며 학 식이 많은 한 청년은, 즐겨 이 종교 서적을 읽고 진 리를 믿었다. 그는 성총(聖寵)으로 마음이 움직이 게 된 결과, 깊은 연구를 거듭하여 우리 종교를 믿 고 그것에 의지(依持)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세례를 주기 전에 우리는 여러 가지로 물어보고, 충분히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다. (중략) 마침내 돌아가 기 전에 그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드 그라몽 신부 께서 그에게 세례를 주고 베드로라는 본명(本名)을 주었다.”

이승훈은 1784년(정조 8년) 음력 3월에 수십 종 의 교리서를 비롯해 십자고상(十字苦像), 성화(聖 畵), 묵주 등 성물은 물론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을 숨겨 서울로 돌아왔다. 이승훈은 염초교(焰炒僑: 지금 서울역 북쪽) 부 근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신앙생활을 실천에 옮기 는 한편, 중국에서 가져온 교리서를 이벽에게 넘겨 주었다. 친구를 통해 소중한 신앙의 선물을 받은 이벽 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 다. 교리 연구를 마친 이벽은 숨어 있던 곳에서 나 와 이승훈과 정약종, 정약용 형제를 찾아가서 이렇 게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도리이고 참된 길이요, 위대하신 천주께서는 우리나라의 무수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가 그들에게 구속의 은혜에 참여케 하기를 원하시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오. 우리는 천주의 부르심에 귀를 막고 있을 수가 없 소. 천주교를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야 하오.”

복음 전파에 대한 열망으로 끓어오른 이벽(李 檗: 1754~1786)은 1784년 음력 9월 서울 수표교 부 근에 있던 자신의 집 대청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 례를 받았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신기원을 이루게 된다, 평신도들의 힘으로. 당시 이벽의 나이 30세, 이승훈은 28세의 청년이었다. 이벽은 망설임 없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섰 다. 그는 중인 계급의 친구들 가운데 학식과 덕망 이 뛰어난 이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들 중 최창 현, 최인길, 김종교 등을 비롯해 많은 양반들이 하 느님을 알고 믿게 되었다.

2. 둘째 마당 - 평신도, 한국 교회를 다시 열다 
1800년 정조 임금이 병으로 승하하자, 이듬해인 1801년 1월 10일 사학금지령이 선포되면서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이 일로 300명이 넘는 희생자가 생겨났고, 최필 공, 이존창,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권철신, 정약 종, 최창현, 강완숙 등 초기교회 신앙선조들 대부 분이 순교하거나 유배됐다. 1801년 4월 19일.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로 1795년 조선에 들어와 복음화의 기틀을 마련해 가 던 주문모 신부마저 순교하자 한국 교회는 이후 34년간 목자 없는 교회로 남아야 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평신도들은 사제 영입 운동 과 선교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신유박해로 아버지 정약종과 형 정철상(카롤로) 을 잃고 백부와 숙부인 정약전, 약용마저 유배에 처해지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음에도 일곱 살 정하상(바오로: 1795~1839)의 마음에서는 도리어 주 님의 일꾼이 되겠다는 다짐이 강해졌다. 가산이 몰수당해 갈 곳이 없어 남은 가족들 모 두 다시 고향인 경기도 마재로 내려갔으나 문중 사 람들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갖은 냉대와 멸시뿐이 었다. 청년으로 자란 정하상은 친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813년 홀로 서울로 올라온다. 그는 조증 이(바르바라) 집에서 머물면서 교리를 배우고 교회 일을 열심히 했다. 그 후 더욱 깊이 교리를 공부하 기 위해 함경도 무산에 귀양 가 있던 한학자 조동 섬(유스티노)을 찾아가 천주교 교리와 한문을 배우 고 다시 상경한다. 어엿한 재목으로 성장한 정하상은 시름에 빠져 있는 이 땅의 신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선다. 성직자 영입을 위해 신분마저 숨 기고 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간다. 

1816년 동지사 일 행에 섞여 북경에 간 그는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 고 주교에게 성직자를 요청한다. 하지만 당장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한다. 이후 정하상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조신철, 유 진길과 함께 아홉 차례나 북경을 오가면서 북경에 있는 주교와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는등 끊임없이 성직자 영입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노 력의 결과 마침내 1827년 조선 교회가 파리 외방 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교구가 설정되기에 이른다. 교회 재건을 위한 나선 지 10여 년 만에 유 방제, 나 모방, 정 샤스탕 신부와 범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앵베르 주교는 정하상이 사제가 되기에 적당한 인재라고 여겨 이신규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라 틴어와 신학을 가르쳤다. 조선교회의 앞날에 서광 이 비치는 듯했다. 그러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사이 세력다툼으 로 또다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는 주교를 피신시 키는 등 교회를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하지만 1839년 7월 어머니 유 체칠리아, 여동생 정정혜(엘리사벳)와 함께 체포되고 만다. 그는 자 신이 쓴 「상재상서(上宰相書)」를 대신에게 올려 천 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다. 박해의 부당성 을 뛰어난 문장으로 논박했기에 조선 조정에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하상은 서양에서 온 사제들의 은신처를 대고 배교하라고 강요당했으나 거절했다. 톱질형을 받 아 살이 떨어져나가고 골수와 피가 쏟아져 나오는 고문이 이어졌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포청에서 여섯 차례의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 로 넘겨져 다시 세 차례에 걸친 형문을 당한 그는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1839년 9월 22일, 정하상은 자신의 아버지 정약 종이 순교한 서소문밖 형장에서 같은 죄목으로 참 수되어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역사의 순간마다 복음화의 문을 열어 제친 평신도들로 인해 빛의 자녀로 오늘 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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