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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평신도
  • 2017년 봄 / 계간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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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집] 평신도가 제자리를 찾아야
첨부 작성일 2017-04-14 조회 1694

한국평협 창립 50주년 맞이 – 역대 평협 회장을 만나다 【류덕희 회장】 

평신도가 제자리를 찾아야 

대담·정리 김문태 편집위원

2018년은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설립 50주년이 다. 이를 준비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이번 호부터 생존하고 있 는 역대 한국평협 회장을 만나 지난 50년을 회상하는 한편, 앞 으로의 50년을 전망하는 인터뷰 기사를 싣기로 한다. 한파가 몰아친 지난 2월 9일 낙성대 전철역 바로 옆에 자리한 경동제 약 9층 회의실에서 류덕희 모세 회장을 만났다. 그는 1996년부 터 2000년까지 제11대와 제12대 한국평협 회장을 역임하였다. 여든이라는 나이에도 패기와 의욕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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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언제 어떤 계기로 받게 되셨는지, 그리고 언제부터 교회에서 봉사하게 되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저는 서울 성동공업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그 때 친구들과 함께 개신교 교회에 몇 차례 간 적 이 있습니다. 정식으로 다닌 건 아니고요. 그러다 1956년에 성균관대학교 화학과에 들어갔는데, 철 학 교수님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천옥환 교수님 의 철학 강의를 들었는데, 그분은 여러 종교 중에 천주교가 가장 낫더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천 주교를 좋게 생각하게 되었지요. (천옥환 교수는 1980년 군부에 의해 해직된 교수들 중의 한 명이다. 류 회장은 그러한 비판적 지식인의 모습에 매료되었던 듯 하다. 실제로 류 회장은 1960년 4.19혁명 당시 성균관대 학교 문과대학 학생회장으로 4.19의거 학생대책위원회 성균관대학교 대표이자 4.19민주혁명 순국학생위령탑 건립위원회 재정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96년부 터 현재까지 4.19육영사업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것도 그러한 활동의 연장이다.) 저는 1976년부터 경동제약을 이끌어왔는데, 1979년에 용산본당에서 우리 집사람과 함께 세례 를 받았습니다. 그 뒤로 피정이나 성령세미나에 참가하면서 신앙을 키워나갔지요. 그러다가 본당 에서 구역장을 하고, 1981년부터 전례분과장을 했 습니다. 그런데 그때 사목회장의 예스맨 스타일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평신도가 할 말을 못하면 교 회가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그러던 1985년이었 습니다. 11월에 집안의 시제에 다녀왔는데, 주일에 김택암 베드로 주임신부님을 뵀습니다. 그런데 저 보고 “총회장이 되신 걸 축하합니다.”라고 하시더 라고요. 사목회장이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한사코 거절했습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도 않았는데, 무슨 사목회장을 하냐면서요. 하지 만 신부님께서 사목위원들과 함께 세 번이나 저를 찾아와 간곡하게 말씀하셔서 결국 수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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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1990년까지 총회장을 하고, 1993년부터 1998년까지 다시 연임을 했습니다. 그때는 총회장 을 1년씩 임명하셨는데, 10년 동안 총 10번 사목회 장을 한 셈이지요. 사실 주임신부님이 제게 사목회장을 시키신 이 유가 있었어요. 당시에 용산본당이 상당히 복잡했 거든요. 성당이 무허가 건물이었어요. 6·25전쟁이 끝나고 성당을 짓다보니까 그냥 공터에 지은 거예 요. 그래서 한쪽은 시유지고, 다른 한쪽은 국유지 고, 또 다른 한쪽은 수녀원 땅이었어요. 땅의 소유 문제뿐만 아니라 녹지를 대지로 용도 변경해야 했 지요. 제가 사목회장을 하면서 1987년에 그걸 다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새 성당을 지은 겁 니다. (용산본당은 1988년에 새 성당 기공 미사를 드리 고, 1989년에 지하 1층과 지상 3층 규모의 새 성당 봉헌 식을 하였다.) 김용태 요셉 신부님이 새로 부임하셔 서는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새 성전을 짓고 빚이 많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예산이 남았으니까요. 적자를 엄청 낸 걸로 알았던 거예요. 하려면 제대 로 해야 한다는 것이 제 신념입니다.

평협 회장에 언제 어떠한 계기로 취임하셨는지, 
그리고 임기 중에 어떠한 지향과 주안점을 가지고 활동하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당시에는 본당 총회장단 회의가 교구에서 있었 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교구에 드나들게 됐습 니다. 용산본당의 문제로 주교님이나 신부님들과 여러 차례 상의하였지요. 그때 책임감을 갖고 일 했거든요. 그러던 중에 당시 박정훈 평협 회장님 이 제게 평협 사무총장직을 제안하셨습니다. 그래 서 1989년부터 평협 사무총장에 이어 부회장을 하 다가 1996년 2월에 11대 평협 회장으로 선출된 겁 니다. 그리고 2000년 2월까지 한 차례 연임했습 니다. 본당에서 사목회장도 하면서요. 그러니까 1985년 본당 사목회장부터 하면 2000년까지 15년 간 봉사한 것이지요. 제가 평협 회장이 되고 바로 IMF가 터졌어요. 일이 몰릴 때 한꺼번에 몰린다고 그때 경제를 살 리는 일이 제게 많이 맡겨졌습니다. (실제로 류 회장 은 1997에 경제살리기 범국민운동 공동대표, 1998에 실 업극복국민운동 운영위원과 실직가정돕기 범국민운동 공동대표를 하였다.) 교회 안에서도 우선 도시와 농 촌을 잇는 일을 시작했지요. (그 일환으로 류 회장은 1997년에 도농협력 전국장터를, 1998년에 도농공동체 나눔잔치를, 1999년에 대희년맞이 도농 한마당잔치를 열었다.) 각 본당에서 농산물 구매 쿠폰을 사서 서 초구청 마당에 집결한 농산물을 직거래했던 것이 지요. 그와 더불어 아나바다 운동과 같은 빈민돕 기운동도 했어요. 그리고 1998년에는 외채상환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 선언식에도 참가했습니다. 저 역시 금모으기 운동 때 우리 집사람의 목걸이 하 나만 남기고 다 냈거든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시급 했던 일은 북한을 돕는 문제였습니다. (류 회장은 1997년에 최창무 주교의 인솔 하에 북경에서 남북가톨 릭신자 대표 회동을 하였고, 1998년에는 북한을 사목 방 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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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 교회가 처음으로 북한에 곡식 을 보내기도 하면서 북한 동포와 신자들을 도왔지 요. 그러한 일들이 성과를 보일 때 참 보람을 느끼곤 했습니다. 저는 평협 회장이 되고 나서 평신도가 깨어났 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습니다. 평신도들이 너무 위축되어 있고 맹목적이지 않은가 생각했어요. 미 신하고 똑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미신을 믿는 사람들과 차별화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 신도 대표들을 바꿔보고 싶었어요. 제 이전에 박 정훈 회장 때 ‘내 탓이오’ 운동을 했고, 이관진 회 장 때 ‘우리 농산물 먹기’ 운동을 했어요. 제가 평 협 회장이 되고 나서는 ‘평신도 제자리 찾기’ 운동 을 제창했습니다. 우선 ‘평신도 선언’부터 만들고, 2000년 대희년을 대비하였지요. 대희년을 준비하 는 데 있어 삼 년에 걸쳐 매년 성자·성령·성부 의 해를 선포했어요. 그에 따라 ‘새 날 새 삶’ 운동 을 했지요. 저는 주교회의 대희년 준비위원회에 가서 주제 발표를 하면서 사제와 수도자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했어요. 우리 평신도도 바뀌어야 하지만요. (당시에 발간된 소책자 ‘평신도 선언’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며 꺼내보였다.) 거기에 맞춰서 ‘평신도 제자리 찾기’ 운동도 하자. 자기반성과 회개를 통해서 자 기 위치를 제대로 찾자. 우리가 변하면 세상도 변 한다. 그다음에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처럼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자. 평신도들이 성자· 성령·성부 세 단계로 나눠서 살자며 ‘평신도 선언’ 을 만들었지요. 그래서 1999년 5월에 대희년맞이 묵주기도 1억 단 바치기 운동을 시작했고, 10월에 대희년맞이 평신도 대회를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주제로 올림픽공원 제3체육관에서 했던 겁니다.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위상과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평협이 나아갈 길에 대하여 말씀해 주세요. 
평신도가 지금 말을 못해요. 성직자나 수도자 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하지만, 할 이야기는 해야 지요. 평신도가 세운 교회답게 평신도의 위상을 세워야 합니다. 평신도가 미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교회가 발전하지 못합니다. 빨리 제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평신도 활동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교 구와 평협과 각 본당이 유기적인 관련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본당의 사목협의회가 평협과 긴밀한 연관을 가질 때 한국 교회가 발전할 수 있을 겁니 다. 평신도의 의견과 요구가 평협과 긴밀히 소통 되고 조율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평신도가 교회를 위해 제대로 일할 수 있고, 평신도의 위상도 올라 갈 겁니다. 사제만 바라보면 안 되는 것이지요. 사 제나 수도자들의 교회가 아니니까요. 본당에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을 교구에 와서 주교님과 신부님 의 처분을 요구하면서 하소연할 때 참 속상했습니 다. 본당 일은 본당에서 평신도들의 손으로 해결 해야지요. 평신도들의 역할이 필요한데, 지금과 같은 사 제 중심의 신앙생활은 앞으로 문제가 있을 겁니 다. 평신도들이 성직자와 수도자를 잘 모셔야 합 니다. 

하지만 주종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성직자가 유아독존적 사목방침을 펼친다거나 군림해서는 안 됩니다. 프란 치스코 교황님처럼 사제는 사제로서의 직분을 지 켜야 합니다. 사제는 사제답게, 평신도는 평신도 답게 현실을 극복해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지 않 으면 안 됩니다. (‘평신도 선언’에서도 성직자는 섬김 을 받기보다 섬김으로써 참된 목자로 거듭나 주기를, 또 한 수도자는 교회의 영적 활력소가 되어주기를 희망하 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화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교가 불변하여 오늘날 쇠퇴해 가는 것이 타산지석이 됩니다. 기업이 변화를 추구하지 못하면 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도 그렇습니다. 꾸준한 자기변화 를 모색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을 교회로 불러들이 려면 새롭게 탈바꿈해야 합니다. 새로운 프로그램 을 개발해야 젊은이들이 교회로 돌아올 겁니다.

지금 교회에 주일학교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적습 니다. 평신도도 그렇지만, 성직자가 변화에 앞장 서야 합니다. 성직자가 잘해야 평신도도 잘하지 요. 노력하면 길이 있습니다. 변화하고자 하면 길 이 열리게 돼 있어요. 앞으로 평협이 이러한 일을 하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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