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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평신도
  • 2017년 봄 / 계간 55호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특강: 병인순교와 현대사회의 평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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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야기] 당신 손에 제 운명이 달렸으니 제 원수들과 박해자들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시편 31,16)
첨부 작성일 2017-04-17 조회 940

북한생활 체험기4 

당신 손에 제 운명이 달렸으니 제 원수들과 박해자들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시편 31,16) 

박정일 주교 마산교구 원로사목자, 전 마산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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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공산치하에서의 생활과 짧았던 덕원신학교 생활, 위험했던 피난길, 그리고 파란만장했던 제주도의 피난 신학교 생활 등의 추억을 더듬으며, 그 긴 세월 저를 보호하시고 이끌어주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섭리에 한없는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나는 혼자서 하루 종일 예성강 강 가를 따라 38도선 가까이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저녁때 쯤 되어 피난민들 이 강을 건너고 있는 곳까지 도달하 였다. 개성읍이 가까운 지점이었다. 38도선이 가까워서인지 멀리서 포성 이 들려오기도 하여 무서웠다. 수심 이 깊지 않아서 걸어서 건너기에 어 렵지 않았지만 12월 중순이라 강물 이 매우 찼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는 피난민들을 따라 개성읍으로 들어가서 성당을 찾 았다. 거기에도 으레 많은 피난민들 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또 나는 혼자서 걷기 시작하였다. 남으로 남으로, 서 울로 서울로…. 그런데 얼마나 걸었 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어떤 중년 남 자가 길가에서 피난민 청년들을 상대 로 국군 지원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나는 쉽게 거기에 응했다. 지금 생각 하니 그때 나의 생각이 매우 단순했던 것 같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고, 내 가 신학교에 가서 사제의 길을 걸을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으니, 우선 젊 은이로서 나라에 대한 의무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중년 남자가 ‘다른 지원자를 데리고 오겠지.’ 생각하면 서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데 어찌된 셈인지 그 사람이 다시 나 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한참을 기다리다가 ‘내가 국군을 지원하는 것이야 아무 때나 어디서나 할 수 있 다.’ 는 생각으로 다시 혼자서 걷기를 계속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혹시 그 사람이 국군을 위장한 북한의 오 열이 아니었는지 의심이 난다. 만일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오늘의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찔하다.

성신대학 신학생이 되어 
그런 일이 있은 후, 하루는 많은 피난민들이 줄 을 이어 걷고 있는 길가에 앉아서 쉬고 있는 나의 외숙모와 외사촌 동생을 만났다. 이 외딴 곳, 피난 길에서 우연히 가족을 만나다니….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위로를 만 끽하며 함께 걷게 되었다. 드디어 서울에 도달한 것이 12월 23일 저녁 무렵이었다. 내가 평양을 출 발한 지 만 20일 만이었다. 서울에는 작은 외숙부가 살고 계셨다. 외숙부 댁에서 이틀을 지내고 성탄 날 아침 명동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하였다. 그때의 나의 기쁨, 느낌, 마음이 어떠했었는지, 무슨 기도를 했었는지 지금 은 아득할 따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근 70년 전 일인데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 위험 등의 기억이 교차하고 겹쳐서 분별이 안 되었던 탓일까…. 미사 후에 성당 마당에서 북한 덕원신학교에서 철학과 학생이었던 베네딕토회 신학생 황춘흥 다 미아노를 만났다(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나의 첫 물음은 신학교와 신학생들의 소식이었다. 많은 신 학생들이 군에 입대하였거나 귀가하여 현재 혜화 동 신학교(현 가톨릭 대학교, 당시는 성신대학)에는 신 학생 몇 사람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알려주었다. 다음 날 나는 곧바로 물어물어 혜화동 신학교 를 찾아갔다. 그런데 반갑게도 거기에서 평양교구 신학생 두 사람을 만났다. 하나는 덕원신학교에 같이 있어서 잘 아는 정의채 바오로 몬시뇰(당시는 철학과 학생이었고 사제가 되어 서울 가톨릭 대학교 철 학과 교수와 학장을 지내고 지금은 은퇴하여 계신다.)과 김진하 부제였다. 피난길에서 같은 교구 신학생을 만난 기쁨과 어려운 피난길을 함께할 수 있게 되 어 느끼는 안도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 였다. 김진하 부제가 곧바로 나를 당시 학장이셨던 정규만 마르코 신부님께 데리고 가서 “이북에서 피난 온 평양교구 신학생인데 동행해도 되는가.” 문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로써 나는 비로소 성신대학 신학생이 되었던 것이다. 매우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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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새해를 맞이하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두 분 신학생과 나) 한강에 놓여 있는 임시 부교(당시에 한강 인도교와 철교는 모 두 파괴되어 없었다.)를 건너 영등포역에서 마지막 피난 열차를 탔다. 기차는 이름만 기차이지 기차 형태도 아니었다. 기차 안팎과 위(꼭대기) 할 것 없 이 사람과 짐 등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뿐인가. 기차는 가다가 서고 또 기다리고 등…. 하룻밤을 지새우며 12월 28일 오후쯤 대구 역에 도착하였다. 그래도 이 막차를 탈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구대교구 주교관 옆에 안넥사(Annexa=라틴어 로 부속 건물이라는 뜻)라는 작은 건물이 있었는데 약 30명의 신학생들이 모여 있었다고 기억한다. 우 리를 맞이한 신학생들은 우리가 북한에서 피난 온 학생들이라며 기쁘게 환영해 주었다. 우리는 거기 에서 약 20일을 지냈는데, 나는 그 당시의 신학생 총급장이었던 이인하 신학생(대전교구 신부로서 지 금은 고인)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분의 부드 럽고 친절한 태도가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이 다. 이인하 신부님은 지금까지도 친절함과 부드러 운 성품으로 널리 회자되는 분이시다. 우리 신학생들은 대구에서 1951년 신년을 맞이 하였다. 1일 아침 모든 신학생들이 당시 대구교구장이셨던 최덕홍 주교님께 합동으로 세배를 드린 것이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안넥사에서 우리는 특별한 일정 없이 지냈다. 그 나날이 무위 의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오랜만에 누리는 평안 한 나날이면서 한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상념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추억이 나의 머리 를 스쳐가는 시간들이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렵사리 입학하였 던 덕원 신학교가 공산정권에 의해 폐쇄되어 강제 로 귀가해야 했던 일, 평양에 도착하여 교구장이신 홍용호 주교님께서 공산정권에 의해 불시에 납치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허탈감, 그리고 교구 신부님, 동료 신학생들과 헤어져서 산골 고향집에 돌아가 사제의 길이 아득히 보이지 않던 고향에서 지낸 무료한 나날들, 1950년 3월에 월남을 감행하 다가 해주 38선 정치보위부에서 지낸 2개월간의 절망적인 유치장 생활, 그리고 대구에 도착할 때 까지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고달팠던 20일간의 피 난 길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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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한편, 헤어진 부모 형제와 가족들의 안 위와 소식을 알 수도 없고 알아볼 길도 없는 것이 답답하고 걱정되어 마음이 아팠다. 또한 나 홀로 이 어려운 시기를 평안하고 안전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그런 가운데 하루는 월남에 성공한 사촌 여동생 데레사(후에 한국 순교 복자회 수녀가 되었음)가 신학생들이 대구 주교관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알고 나를 찾아와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 지만, 그때는 함께 식사를 나누거나 지난 이야기 를 할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될 수 없는 어려운 상황 이었다. 더구나 우리 신학생들은, 언제가 될지 예 측하기 어렵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제주도로 이 주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 피난 신학교에서 로마로 
1월 20일경이었다고 기억되는데 우리는 제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군용 버스로 부산으로 내려 갔다. 그러나 제주 가는 배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4~5일 동안을 부산 중앙성당과 몇몇 교우 집에 분산되어 숙식을 해결하면서 기다려야 했다. 어렵 게 미군 수송선 LST를 타고 부산항을 떠난 것이 며칠 후 저녁 무렵이었다. 그날 밤 많은 학생들이 배멀미로 고생을 했다. 나도 몹시 배멀미를 한 기 억이 생생하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제주도 모슬 포 앞바다에서 하선하였다. 그리고 하루 종일 걸 어 저녁 무렵에 서귀포읍에 도착하여 서귀포 본당 에서 1박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도달한 곳이 우리의 목적지인 서홍리공소였다(당시 서귀포본당 공소, 현재는 한국순교복자 수도회가 운영하는 ‘면형의 집’ 피정 센터가 있다). 이렇게 신학생들이 서홍리공소에 자리를 잡음 으로 ‘제주 피난 신학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 리는 안도의 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때 우리 인원은 대신학생 약 10명, 소신학생이 30여 명 합 하여 총 50명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신학교 장상 으로는 정규만 마르코 학장 신부님과 한공렬 베드 로와 오기순 알베르토 교수 신부님 그리고 조창 희 베네딕토 경리 담당 신부님 네 분뿐이었다. 우 리는 한데 모여서 살았을 뿐 신학생으로서 학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은 못 되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는 서홍리 신학교에서 약 1개월 반을 지내고 급히 제주읍으로 자리를 옮겨 야 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아직 한라산에 많은 공비들이 있었고 가끔 부락을 습격하여 약탈과 사 람을 납치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3월 초에 우리가 있는 서홍리 마을이 습격을 당하여 신학생들이 크 게 놀랐고 납치를 당할 위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신학교는 더욱 안전하다고 여 겨지는 제주읍에 있는 신성여고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서홍리공소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학교 강 당과 교실 등에서 숙식하면서 지내다가 약 1개월 후인 5월 중순께 대신학생들은 부산시 영도에 있 는 신선동본당에 자리를 옮기고 소신학생들은 경 남 밀양읍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별과(라틴과) 학생이었기 때문에 영 도 신학교에 머물게 되었다. 부산 영도 신학교에서의 생활은 많이 안정되었 었다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은 여전히 좀 불편하 였지만(아침에 일어나면 세숫대야를 들고 산에서 흘러 내리는 도랑에 가서 세수와 양치를 해야 했다.) 일부 신 학과 철학 강의가 정상적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비로소 철학과 1학년 공부를 시작하였고 다음해인 1952년 8월 14일 로마 우르바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북한 생활 체험기’를 마치면서 
1945년 8월 15일부터의 북한 공산치하에서의 생활과 짧았던 덕원신학교 생활, 위험했던 피난 길, 그리고 파란만장했던 제주도의 피난 신학교 생활 등의 추억을 더듬으며, 그 긴 세월 저를 보호 하시고 이끌어주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섭리 에 한없는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또한 저의 체 험기를 읽어 주신 <평신도>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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