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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집]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첨부 작성일 2018-03-18 조회 834

한국평협 설립 50주년 맞이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정리 서상덕 편집위원

 

신앙은 죽음까지 불사하며 주님의 길을 걷는 선택이다. 주님처럼 ‘세상을 이기리라’는 희망에 차서···. 주님을 향한 온전한 투신이 순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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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순교 역사 속 평신도

 

•가톨릭교회 역사는 순교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가슴에 품고 있기에, 세상 너머에 눈을 두고 살기에···. 세상과의 불화가 낳은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순교로 이룩한 신앙의 역설은 바로 ‘세상’에 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세상임에도 주님에게서 멀어져 버린 세상. 그런 세상을 극복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 바로 신앙임을 순교 역사는 들려준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신앙은 죽음까지 불사하며 주님의 길을 걷는 선택이다. 주님처럼 ‘세상을 이기리라’는 희망에 차서···. 주님을 향한 온전한 투신이 순교다.

 

•한국 교회 초창기 역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님에게서 멀어져, 당신의 숨결조차 느끼기 힘든 세상, 아귀다툼 속에 당신의 거룩함이 사그라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순교의 피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다. 어느새 그 피가 내를 이루고 강을 넘쳐 바다로 흘러든다.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최초의 박해라고 할 수 있는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는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이 맞은 서설(瑞雪)이다.

이를 필두로 1801년 신유박해, 1815년 을해박해, 1833년 정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1879년 기묘박해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순교자의 피가 어려 있다. 초대교회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다. 하나뿐인 생명까지 내어놓지 않고는,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사랑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평신도의 걸음걸음에서 한국 교회의 오늘을 이룬 순교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3 셋째 마당 - 순교로 믿음의 씨 뿌리다Ⅰ

한국 교회 첫 순교자 윤지충(바오로, 1759~1791) 복자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꼽히는 윤지충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품행이 단정해 인근 마을에서까지 칭송이 자자했던 인물이다. 스물넷 되던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해 명성이 더 높아졌다.

 

이듬해 1784년 겨울 상경이 그의 인생행로를 바꿔놓았다. 천주교에 대한 얘기를 처음 접한 그는 명례동(明禮洞, 현재 서울 명동)으로 김범우(토마스)를 찾아갔다. 김범우의 집에서 나온 그의 손에는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이 들려있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윤지충은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갖던 이승훈을 비롯, 정약전(丁若銓)·약종(若鍾)·약용 (若鏞) 형제, 권일신 부자 등 10여 명이 체포돼 형조로 끌려갔다. 이 소식을 들은 윤지충은 가지고 있던 교리서들을 모두 불태우거나 물로 씻어버렸다.

 

주님은 다시 그를 부르셨다. 1786년 고종사촌인 정약전이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했다. 이듬해 그는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아 드디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

 

일가가 있던 전라도 진산으로 돌아온 윤지충은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프란치스코)은 물론 자신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외사촌인 권상연(야고보)에게 신앙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이도 윤지충이었다.

 

1790년 윤유일(바오로)이 중국에서 가져온 북경교구장 구베아(A. Gouvea, 중국명 湯士 選·1751~1808) 주교의 사목서한이 조선 신자들에게 전해졌다. 이 서한에는 조상 제사를 금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때 많은 양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났다. 하지만 윤지충은 교회의 뜻을 충실히 따라 신주를 불태우고 신주를 넣었던 빈 궤만 사당에 세워 놓았다. 그만큼 윤지충은 가톨릭 신앙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깊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791년 음력 5월 그의 어머니 권씨 부인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윤지충(바오로)은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말라.” 는 어머니의 유언과 신앙에 따라 외사촌 권상연과 장례를 치르지 않고 모친의 신주를 불태웠다. 당시로서는 사대부가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다는 것은 웬만한 각오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조상의 신주를 불태웠다는 것은 윤지충의 신앙이 매우 확고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저명한 선비가 신주를 불태웠다는 소문은 조선 사회를 커다란 충격에 빠뜨렸다. 더구나 이 사건은 조선 사회가 겪어보지 못했던 천주교라는 새로운 사상과 조선 사회를 유지해 오던 성리학적 질서가 본격적으로 충돌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윤지충에 대한 소문을 접한 진산군수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도록 명했다. 두 사람은 이미 피신을 했지만 윤지충의 삼촌이 대신 진산군 관아에 잡혀 들어가게 되자 1791년 10월 26일 진산 관아에 자진 출두했다. 10월 29일까지 진산군수에게 몇 차례 신문을 받은 후,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전라 감영에 압송된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의 심문을 받는다.

 

“천주(天主)를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코 공경하고 높이는 뜻이 못됩니다. 그런데 사대부 집안의 목주(木主)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니,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집안에 땅을 파고 신주를 묻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갑니다. 죽은 이의 집에 남아 있을 수 없고 또 남아 있어야 할 영혼도 없습니다. 이는 제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증명된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위패 나무 조각 하나를 모셔두고 거기에다 제사를 지내며 음식을 바치는 것은 부모님께 거짓된 도리로써 효심과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윤지충이 전라 감영에서 고문을 받으며 진술한 내용을 보면 그의 신앙이 얼마나 확고한지 알 수 있다. 그의 삶에서 최고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군왕이나 부모가 아니라 ‘천주(天主)’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상의 위패를 거리낌 없이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윤지충은 “형문을 당할 때, 하나하나 따지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1791년 11월 8일 전주 감영에서 순교의 관을 쓴다. 윤지충의 순교는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 천주교는 단순한 이단 학문이 아니라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가치관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거대한 시대적 흐름에서 볼 때 윤지충이 신주를 불사르는 행위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상 변화를 야기하는 부싯돌이 되었다. 윤지충과 같은 평신도들의 과감한 도전이 있었기에 조선 사회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 것이다.

 

4 넷째 마당 - 순교로 믿음의 씨 뿌리다Ⅱ

한국 교회 첫 여성 회장 강완숙 (골롬바, 1760~1801)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여섯 차례에 걸친 혹독한 형벌조차 아무 소용이 없자 그를 고문하던 나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한국 교회 최초의 여성 회장 강완숙(골롬바)은 그렇게 교회사에 아로새겨졌다. 그의 굳은 신앙심은 박해자들의 기마저 꺾어버릴 정도였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이를 널리 전파하였고, 6년 동안 주문모를 숨겨주면서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천주교에 물들게 하였다.”

 

사형 선고를 받은 강완숙에게 붙은 죄목이었다. 이에 대한 강완숙의 최후 진술은 이러했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1794년 12월 23일 조선 입국에 성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야고보, 周文謨) 신부. 그를 박해와 죽음의 손아귀에서 지켜내는 일이 여성인 강완숙에게 지워진 십자가였다.

 

숱한 어려움 속에 이 땅에 들어온 주문모 신부는 서울에 들어와,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숨어서 1795년 6월까지 전교에 힘썼다. 그러나 한영익(韓 永益)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주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피신해 6년간 숨어 지내며 전교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강완숙이 없었더라면 이 땅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한순간에 말라버렸을지 모른다.

 

주 신부가 자신의 집으로 피신해 오자 그는 주 신부를 곳간에 숨겼다. 밖에서 볼 때는 평범한 광이었으나 안쪽에 숙식이 가능한 자리와 처소를 꾸며 주 신부가 숨어 지내게 했다. 남자들도 잡히면 죽을까봐 몸을 사리는 마당에 체포령이 내려진 신부를, 그것도 여인의 신분으로 숨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위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조심 주 신부를 보살폈다. 하루 세끼 음식을 대접하는 것 외에도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문밖에는 나졸들이 주 신부를 잡기 위해 잔뜩 독이 올라 있었으나 그렇다고 무작정 숨어 지내기만 할 수 없었다.

 

주 신부는 강완숙과 자주 상의하여 사목 계획을 세웠다. 변장을 하고 강완숙을 따라 거리로 나오자 예상했던 것보다 검문검색이 심했다. 그때마다 강완숙의 기지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대담하게 주 신부를 수행해 지방을 순회하는 사제의 사목을 돕는 일도 강완숙의 몫이었다. 전국을 돌며 사목활동을 마친 주 신부가 지친 몸을 이끌고 무사히 서울로 숨어들어 올 수 있었던 것도 강완숙의 치밀한 계획과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완숙의 수완과 활약에 힘입어 주 신부 입국 당시 4,000명에 불과하던 신자 수가 5년 만에 1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중에는 머슴, 하녀들뿐 아니라 지체 높은 양반 부녀자들도 있었다. 왕실의 친척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받도록 주선한 것도 그였다. 처녀 교우들이 많아지자 ‘동정 공동체’를 만들기도 했다. 윤점혜 아가타가 동정녀 공동체를 이 끌어 나간 곳도 강완숙의 집이었다.

 

강완숙은 주 신부를 모시면서 비밀 유지를 위해 이사를 여러 차례 하는가 하면 특히 신부를 찾아오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늘 경계하며 신경을 썼다. 천주교에 관대했던 정조가 승하하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강완숙이 주 신부를 숨겨온 사실을 알아낸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 갔지만 이미 피신시킨 뒤였다. 포도청에 잡혀온 그는 온갖 고문을 받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강완숙은 신심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형장인 서소문 밖으로 나가는 길에서도 강완숙은 다른 4명의 여교우들을 격려하고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 였다. 즐거운 빛으로 제일 먼저 목숨을 바치니, 그 때 나이 4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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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위 복자 전체도 "새벽 빛을 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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