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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눔] ‘하느님의 백성’과 21세기 교회
첨부 작성일 2018-03-18 조회 829

평신도 연구

‘하느님의 백성’과 21세기 교회

 

황경훈 바오로 우리신학연구소장

 

‘공의회 학교’라는 이름 아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공부하는 한 모임에 초대를 받아서 공의회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강의 원고대로 발표하는 강의가 아니라 사회자가 질문하면 대답하는, 일종의 대담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러 질문과 답변이 오갔는데, 그 중 평신도 호칭에 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사회자는 ‘신도’라는 호칭이 더 적절할 것 같은데 여전히 ‘평신도’라고 쓰는데, 꼭 필요하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뜻에서 볼 때도 ‘평신도’보다는 신도라는 표현이 더 포괄적이라는 데서 낫지 않느냐는 의견 을 덧붙이면서 말이지요. 하긴 평신도의 정체성, 지위와 역할에 대해 거의 전체를 할애하고 있는, 한국의 첫 본격 평신도론이라고 할 수 있는 『신도론』을 쓴 양한모 선생님이 그 책의 제목을 평신도론이 아니고 신도론으로 정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을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신앙인, 신도인 것이지요.

 

잘 알다시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다른 어떤 공의회보다도 교회와 세상과 관련해 수많은 보물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초기 교부 시대같은 ‘좋은 시절’을 지나고서는 중세적 유물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어서인지 비밀주의적이고 권위적이며 폐쇄집단적이고 비난적인 언어와 태도를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전까지 따르고 지켜야 할 전통인양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오순절’이라고 부를 정도로 표면이 아니라 저 심층에서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개혁적인 방향으로, 곧 초기 교부시대에 보이던 친교와 대화, 설득과 초대, 동의, 공동선과 같은 방향으로 의 전환은, 이를테면 ‘교회가 절간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지속성을 유지하는 같은 교회이지만 그 변화야말로 과연 혁명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보석 같은 말들 중에서 단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이 ‘하느님의 백성’을 뽑겠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성서나 교회사에서 볼 때 오랜 기원을 갖고 있는 용어지만 거의 사어 (死語)가 되다시피 하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와서야 비로소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서로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는 ‘친교의 공동체’라는 의미로 되살아났습니다. ‘금수저, 흙수저’, ‘N포세대’, ‘헬조선’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불의와 불평등을 상징하는 단어들, 특히 극단적 양극화를 지칭하는 이러한 유행어들은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사회경제적 지위에 상관없이 모두를 형제와 자매로 부르고 그렇게 대하는 진정한 친교와 사랑의 공동체임을 보여줄 수 있다면,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성사’(sacrament) 라고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며, ‘빛과 소금’이 되어, 썩어가는 이 사회를 살려낼 수 있는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 시대가, 이 사회가 종교에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 ‘민중은 개, 돼지’라는 어느 한심한 교육자가 했다는 말처럼 금수저의 삶보다도 결코 못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살 만한 가치와 희망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교회의 현실은 사회가 보여주는 불의와 불평등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여성 문제나 성직자와 평신도의 차별은 오히려 일반 사회보다도 더 뒤떨어져 보입니다. 교회헌장에는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 같은 평등의 정신을 강조 하는 교회론도 있지만, 교계와 교도권을 강조하는 대목도 여러 군데여서, 누가 어떤 부분을 인용하느냐에 따라서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교회헌장에는 평신도의 보편 사제직과 성직자의 특수 또는 직무 사제직이 “정도뿐만이 아니라 본질에서의 차이”(10항)가 있다고 적시함으로써 성직자와 평신도를 ‘본질적’(essential) 으로 구분해 내고 있습니다. 위계적인 한국 천주 교회 풍토에서 이 대목은 많은 경우 성직자에게 는 ‘평신도와 다르다’는 것으로 해석되기 십상이고, 그것의 문화가 차이가 아닌 차별로 현실화하여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평신도인 제 입장에서 이 대목을 볼라 치면 그 본질적 차이는 ‘기능적’이며 ‘유비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이라면, ‘본질에서 다르다’ 는 표현은 서구인들의 철학적 세계관이 그렇듯이 실체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져서는 올바른 신학적 해석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면, 그리하여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체성사 때 우리 모두가 성 체성사에 주체로서 참여하는 그리스도라면, 팔이 다리보고 ‘나는 너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지요.

 

‘신도’와 ‘평신도’ 얘기를 하다가 멀리 돌아왔네요. 신도라는 표현도 좋지만 평신도라는 말이 한국 교회에서 갖는 의미는 ‘전문성이 없는’(lay) 사람이라는 뜻보다는 ‘평등’이라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가치를 지니고 또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바로 그 평등의 공동체로서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대망한다는 희망을 품고 있기에 더욱더 현 시대에 필요한 말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사랑, 바로 자신을 제단에 바친 그 사랑은 ‘모든 이’ 를 고루 사랑하는 평등의 정신으로 구체화된 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탈리아의 밀라노 대교구를 이번 6월에 사목방문 하는데, 고인이 된 마 촐라리 신부와 밀라니 신부의 무덤에 가서 기도를 할 것이라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평화주의자 인 두 신부는 평소 교황청과 이탈리아 교계와 관계가 극히 안 좋았는데, 이들의 무덤을 방문하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탈리아 교회에 주는 명확한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곧 세상 속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내치지 말고 오히려 더 가까이 하고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라고 봅니다.

 

이제 평신도를 사목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양떼’로만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21세기 의 교회가 나아갈 방향은 미세먼지로 가득한 요즘 기상과 비슷해 보입니다. 갈 길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목소리 없는 우주 피조물의 고통을 섬세하게 듣는 것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님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하느님 의 백성’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고 의논하며, 성찰하고 기도함으로써 그것에서 나오는 힘으로 실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평등한 공동의 논의와 합의와 실천의 과정에서야말로 성령은 분명 우리가 가야 할 방향으로 이끌어주실 것임을 믿고 또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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