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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강] 교황 프란치스코와 소공동체 1
첨부 작성일 2018-03-18 조회 908

교황 프란치스코와 소공동체 1

 

이병호 빈첸시오 원로사목자, 전 전주교구장 주교

 

이 글은 4월 7~8일 전주교구 천호성지 피정의 집에서 연 2017년 한국평협 춘계 상임위원회에서 ‘한국 교회와 평신도의 역할’을 주제로 한 이병호 주교의 특강 내용으로 두 번에 나누어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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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직자나 수도자 뿐 아니라, 평신도 역시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을 수행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평신도의 사제직에 관해서 공의회는 그들이 하는 모든 일, 기도, 사도적 활동, 부부생활, 가정 생활, 일상적 노동, 몸과 마음의 휴식, 이 모든 일들을 성령 안에서 하고, 특히 삶에 따른 어려움을 잘 견뎌내면, 그것이 영적 제물이 되어 미사 때 주님의 몸에 보태져서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된다고 말합니다(교회헌장 34항 참조).

 

평신도의 예언자직에 관해서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신앙 감각과 말씀의 은총(사도 2,17-18; 묵시 19,10 참조)을 바탕으로, 생활의 증거와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선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교회헌장 35항).

 

마지막으로 평신도의 왕직은,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시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 위에 높이 세워지신 그리스도 (필립 2,8-9)께서 자신이 받은 그 특권을 제자들에게 주신 데에 근거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도 죄의 세력을 물리쳐 이기고, 왕다운 자유를 누리며, 형제들을 섬기고,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창조주의 섭리와 그분의 말씀에 비추어 인간의 노동과 기술, 시민적 문화를 활용하여 창조물을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개발하고, 그 혜택이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등, 세상의 참된 진보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왕직을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공의회 이후, 교회는 이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방법을 여러 면에서 찾아왔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남미의 기초 공동체,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소공동체입니다. 남미에서는 주로 정치 및 경제적 민주화의 과정에서 신자들이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기초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성서를 묵상하고, 기도하고, 연대함으로써 개인의 성화는 물론 사회구조까지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는 주로 사목적 이유 때문에, 모든 신앙인들, 특히 문맹인들까지 그림 등 최소한의 이해 도구만으로도 하느님 말씀을 묵상하고 거기에서 얻은 빛과 힘으로 무장하여 밖에 나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신자들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1992년에 소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2.그런데 공의회 폐막 50주년을 얼마 앞두고 등장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 백성 전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이 3대 직무를 더욱 구체적이고 조직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지침을 주셨습니다. 교황 권고서 「복음의 기쁨」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교회의 최고 목자로 선출되기 4일 전, 교황을 뽑기 위한 비밀회의인 콘클라베에서 동료 추기경들을 앞에 두고 한 발언이 이미 선교-복음화에 대한 그분의 생각을 확실히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의 기 쁨」의 기본 정신이 씨앗처럼 거기에 요약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깊은 감동을 받은 동료 추기경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진 그때의 발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❶. 복음화를 위해서는 먼저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뛰쳐나갈 마음과 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신을 떨치고 나가 저 외곽으로, 변두리로 나가라는 소명을 받았습 니다. 지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존적 의미로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죄, 고통, 불의, 무지, 종교에 대한 무관심, 현대 지성계의 흐름, 모든 형태의 비참상 등 이 모든 신비를 향해 뛰어들어야 합니다.

 

❷. 교회가 복음화를 위해 자신으로부터 뛰쳐나가지 않으면, 교회는 자신만을 바라보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병이 들고 맙니다. (복음에 나오는 망가진 여인을 생각해 봅시다.) 교회 기관 안에서 계속 발생하는 악들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이런 태도와, 일종의 신학적 자기도취에 궁극적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묵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 문에 서서 계속 두드리고 계십 니다. 성서에는 분명히 그분께서 밖에 서서 안으로 들어오시려고 문을 두드리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꾸로, 예수님께서 안에서 문을 두드리시면서 밖으로 나가시려고 우리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호소하시는 시대를 연상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향해 있는 교회는 예수님을 자기 안에 가두어 두고 밖으로 나가시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습니다.

 

❸. 교회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기가 빛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태양에게서 빛을 받아 그것을 반영할 뿐인: 역자의 덧붙임) 달의 신비이기를 그치고, 대단히 심각한 악에 기울어지게 됩니다. 영적 세속성이라는 악입니다. (앙리 드 뤼박에 따르면, 이것은 교회에 닥칠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재앙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구성원들끼리 서로 영광을 주고 받는 형국이 되고 맙니다. 간단히 줄여서 표현 하자면, 교회에 관한 이미지는 둘입니다. 먼저, 자신으로부터 나와 복음화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경건하게 듣고 충실하게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다음은 세속적 교회가 있습니다. 자신 안에, 자신에 의해, 자신을 위해 사는 교회입니다. 이를 마음에 새기고, 우리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교회를 어떻게 바꾸고 개혁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❹. 어떤 분을 다음 교황으로 선출할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하고 경배함으로써, 교회가 자신으로부터 뛰쳐나가 실존적 변방을 향해 가도록 도울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생 산성 풍부한 어머니가 되게 하고, 복음화에 따르는 감미롭고 위로에 찬 기쁨을 느끼며, 거기에서 활력을 얻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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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교황청을 정기방문한 필자 이병호 주교

 

3. 이런 발언으로 동료들을 감동시키고 콘클라베의 분위기를 확 바꿨던 베르골료 추기경이 교회의 최고 목자로 선출되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타나던 첫 순간부터, 세상은 이분이 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에 그대로 옮기는 모습을 보고 계속 큰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의 사목 대헌장이라고 평가되는 「복음의 기쁨」이 반포된 뒤부터 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각과 방침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교황님 이 성직자와 수도자뿐 아니라, 특히 하느님 백성 가운데에서도 절대 다수를 이루는 평신도들에게도 교회 밖으로 나가 복음을 증언하고 선포하라고 촉구하시며 주신 여러 가지 구체적 지침은, 교회의 전통적 입장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놀라운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직자나 평신도나 간에 우리 가톨릭인들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 입니다.” 추기경 시절이던 2010년 한 예수회 잡지 와의 대담에서 하신 이분의 말씀입니다.

 

이분은 그 이유를 설명하시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가 대단히 심각한 병에 걸리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도취 혹은 자폐증 - 교회가 복음화를 위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자기만을 바라보게 되고 결국 이런 중 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몸은 영성의 세계에 담고 있지만 정신은 이미 세상 사람들과 구별이 안 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표현을 따르자면, “짠 맛을 잃 은 소금”(마태 5,13) 혹은 “잘려 나간 가지”(요한 15,6)처럼 아무데도 쓸데없어 밖에 버려지거나 불에 던져지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오랫동안의 전문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은 평신도들이 어떻게 이 어려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주로 사제나 수도자들이 복음선교에 뛰어들어 왔던 관례에 비추어 보면,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엉뚱한 잘못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걱정스런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세례 받은 모든 이는 교회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신앙 교육의 수준에 상관없이 복음화의 능동적 주체입니다. 따라서 복음화 활동이 전문가들이나 하는 일이고, 나머지 신자들은 그저 수동적인 입장이 되어 주는 대로 받기나 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구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진실로 체험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밖으로 나가 그 사랑을 선포하는 데에 오랜 준비나 긴 시간의 훈련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사랑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모두 선교사입니다. (....) 첫 제자들을 봅시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길을 받자마자 곧바로 달려가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소’(요한 1,41) 하고 기쁘게 선포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바오로 성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더 기다리겠습니까?”(복음의 기쁨, 120항).

 

 

4.그렇다면 신앙이나 신학 분야에서 전문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교회가 그런 이들을 믿고 그 일을 맡길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관해 서 교황님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정식으 로 써서 잘 알려지게 된 개념(교회헌장 12항)을 다시 꺼내어 좀 더 발전시키십니다. “신앙감각”(119, 198항)과 “공본성성”(119, 125항)이라는 개념입니다. 이 두 개념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서 사실상 겹쳐지는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앙감각’이라는 표현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이라는 말입니다.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본다는 다섯 가지 기본 감각은 인간뿐 아니라 대부분의 동물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의 냄새를 알아내는 개의 후각, 공중에 높이 떠서도 땅위에서 기어 다니는 작은 동물을 보는 매의 시각, 남극에서 나는 짝의 소리를 북극에서 듣는다는 고래의 청각 등, 이치로 따지고 논리의 연결 고리를 헤아리는 지성 능력이 없는 동물들이 특정 분야의 감각에서 보이는 능력은 인간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손이 뜨거운 물건에 닿았을 때처럼, 감각은 두뇌의 판단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감각기관이 감지한 것을 척추신경이 받아 곧바로 반응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감각이 두뇌를 거치지 않고,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바로 이 점이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믿음이 ‘신앙감각’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것입니 다. 지성을 동원하는 연구나 노력과는 아무 상관 없이,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성령께서 누구에게나 주시는 이 새로운 감각이 믿음에 관한 일들에 관해서 옳고 그름을 본능적으로 식별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바탕에는 세례를 받고 진심으로 믿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하느님의 본성을 함께 지니게 된다는 확신이 깔려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본성을 함께 지니게 된다”는 말을 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 “공본성성共本性性”입 니다. 말은 생소하지만, 내용은 우리가 늘 알고 있던 것입니다.

 

우리 귀에 낯설고 말마디로만 보자면 어렵게 느껴지는 데도 이런 개념을 도입한 것은 언어적 표현 이전에, 교회가 오랜 역사에 걸쳐서 쌓아온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대로, “낫 놓고 기억지도 모르지만” 믿음이 두터운 이가 신학 박사 학위를 여러 개 받은 사람보다 하느님에 관해서 더 분명하고 깊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교회는 계속 체험해 왔고, 그런 현상을 신학적 용어로 표현하려다 보니 이런 말들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가 그 좋은 예의 하나입니다. 글을 배워 겨우 읽을 줄이나 알 뿐, 신학이나 성서를 체계적으로 배워 본 적이 없는 데다, 15세에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 24세에 삶을 마쳤지만,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이 성녀를 자신의 스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 2천 년 역사에서도 몇 안 되는 “교회 학자”라는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가운데 하나이며 신학자로서도 손꼽히는 인물 가운데 하나였던 한스 우르스 폰 발따사르는 소화 데레사가 성서와 신학의 핵심을 꿰뚫어 알고 있는 현상을 보고, 가히 경악할 정도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과 같은 본성을 지니게 해 주시고, 거기에 따른 신앙감각을 통해 성령께서 불어넣어주신 산 지식이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출신 지역인 남미에서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가장 인상 깊고 폭넓게 체험하였습니다. 2008년 10월에 ‘하느님 말씀’을 주제로 열렸던 제12차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에서 남미의 온두라스를 대표해서 오신 주교님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일과 축일에 말씀의 전례를 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특별히 사제가 부족하거나 없는 곳에서 말씀의 전례를 거행할 필요가 절실합니다. 어떤 지역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으면, 부제나 혹은 주교가 인정하는 다른 사람이 말씀의 전례를 주도해야 합니다’(전례헌 장 35,4). 1966년 3월 공의회에서 전례헌장을 반포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온두라스의 촐루테까 교구의 마르쎌 게렝 주교님은 시골 사람 17명을 대충 준비시킨 다음, 사제가 없는 외딴 지역으로 파견하여 성주간을 지내게 하였습니다. 현지 주민들은 대단히 만족하며 기뻐하였고, 성주간뿐 아니라 매 주일에 그런 사람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느님 말씀의 사절’이라는 제도가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지금(2008년 현재) 온두라스와 인근의 다른 몇 나라에 약 만 명 의 하느님 말씀의 사절들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사제 성소도 부쩍 늘어나서, 온두라스의 경우, 젊은 사제들은 모두 하느님 말씀의 사절로 활동했던 이들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대중 신심”(122-125항)의 적극적인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십니다. “순박하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라고 하신 바오로 6세 교황님의 말씀대로, 대중 신심은 하느님 앞에 “철부지 어린 아이”(마태 11,25)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들의 신앙 표현입니다. 그것은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나 똑똑하다는 자들의 식견”(1고린1,19)과는 대조됩니다. 성지순례나 성모님께 대한 각종 신심행위, 그리고 전통적 종교 의식이 강하게 느껴지는 여러 가지 모양의 종교적 축제가 여기에 속합니다. 겉에서 보는 사람의 눈에는 이런 것들이 이상하게 보이고, 때로는 미신행위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실재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판단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착한 목자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복음의 기쁨, 125항). 교황님은 대중 신심이 신학 활동을 위한 기초 자료(같은 곳)가 된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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