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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집]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첨부 작성일 2017-11-08 조회 1511

한국평협 설립 50주년 맞이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정리 서상덕 편집위원

신앙은 죽음까지 불사하며 주님의 길을 걷는 선택이다. 주님처럼 ‘세상을 이기리라’는 희망에 차서…. 주님을 향한 온전한 투신이 순교다.

“평신도에 의해 복음이 전파된 한국 교회를 보십시오. (초창기) 한국에서는 200년 가까이 평신도 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됐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길을 내십니다. 역사를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7년 3월 25일 이탈리아 밀라노대교구(교구장 안젤로 스콜라 추기경) 사목 방문 중 ‘성직자·수도자와 만남의 시간’에 한 말이다. 사제·수도 성소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위기의식이 고 조되고 있는 이탈리아 교회를 향해 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 어느 교회도 이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6년 5월 프랑스 가톨릭 신문 『십자가(La Croix)』와 가진 인터뷰에서도 유 럽 교회를 억누르고 있는 성소 위기와 관련해 얘기하면서 한국 교회 사례를 꼽았다.

“복음화의 원동력은 세례이며, 복음화를 위해 반드시 많은 사제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한국의 경우 지난 200년 동안 평신도들에 의해 복음화가 이뤄졌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급이 있기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교회는 세계 교회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 든 복음화 사례로 꼽혀왔다. 한국을 “평신도에 의해 복음화가 이뤄진 나라”라고 칭하는 것은 한국 교회 평신도가 세계 교회에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의 주인은 절 대자 하느님이시지만, 세상을 복음화로 이끄는 주역은 바로 평신도 그리스도인이다. 교회 역사에 빛나 는 한국 교회 평신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순교’에 가닿게 된다. 한국 교회의 영성을 순교영성이 라고 해도 조금도 과하지 않은 이유다. 

2014년 8월 교황으로서는 세 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124위 가운데 중 국인 주문모 신부를 제외한 나머지 123위 순교자들은 한국 교회의 초석을 놓은 평신도들이다. 이들은 제1세대 순교자들로, 앞서 시성된 103위 순교성 인들을 길러낸 신앙선조들이다. 평신도 순교자들 은 엄격한 사회 구조 속에서도 주님께서 심어주 신 인간 존엄의 가치를 지키며 형제적 삶을 이루 고자 했다.

5 다섯째 마당 - 순교로 믿음의 씨 뿌리다 Ⅲ
황일광 시몬(1757~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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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하느님의 종 124위’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삶을 살 다간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그 첫자리에는 황일 광(시몬) 복자가 든다.

순교자들의 삶을 기록한 약전에 ‘천한 신분’ 출 신이라고만 기록돼 있는 황일광. 하지만, 그는 당 시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대받는 백정이었다. 황일광은 충청도 홍주(현 홍성) 출신으로 알려 져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 백정은 가축 도살과 육류 판매, 유기(鍮器) 제조 등과 같은 일을 하며 살던 계층이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세리’처럼 같 은 민족, 같은 마을에 사는 이들로부터도 배척당 하는 소외된 존재였다. 아니, 세리는 동족의 욕을 먹으면서도 세속의 ‘부’나 그로 인한 힘이라도 누 릴 수 있었지만 백정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도 가질 수 없었다. 그런 만큼 살아생전 사람대접을 받았을 리 없다.

그의 어린 시절은 오늘을 살아가는 일반인들 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우했다. 어린아이 들한테도 반말을 듣고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 런 대접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 풍토였다. 누구나 꺼리는 일을 하고 있음에도 그 땀과 노고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하느님은 그에게 놀라운 은총을 베푸셨다. 그러한 삶에 좌절하지 않고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와 올바름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주셨다.

1792년 그의 나이 서른다섯 되던 해, 홍주를 떠 나 홍산(현 충청남도 부여지역의 옛 지명)으로 이주 하던 무렵 그는 삶에 있어 일대 전기를 맞는다. 우 연한 기회에 이미 홍산을 주 무대로 활동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던 ‘내포(內浦)의 사도’ 이존창(루도 비코 곤자가, 1759∼1801)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 것. 하느님의 부르심이었을까, 황일광은 용기를 내 신분도, 나이도 다른 이존창을 찾아간다. 태어 나서 배움이라고 없었던 백지장 같은 상태였기 때문일까, 교리를 접하자마자 그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가 받아들 인 믿음은 그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 오롯이 자유 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열 망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동생 황차 돌과 함께 고향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했다. 그를 맞은 신앙공동체에서 백정이라는 그의 신분은 아무 걸림돌도 되지 않았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 세에 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을 통해 지금까지도 전해오는 황일광의 말이다. 경상도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신앙에 맛을 들여가던 그는 1800년 2월 경기도 광주에 살 던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의 이웃집으로 이주한다. 이때 만난 이들이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 김한빈(베드로, 1764∼1801) 등이다.

당시 그의 신앙은 모든 교우들의 감탄을 자아낼 정 도였다. 정약종이 한양으로 이주하면서 함께 상경한 그 는 아우와 함께 정동으로 이주해 땔감을 해다 팔 아 생계를 꾸리면서, 힘닿는 대로 교회 일을 도왔 다. 이때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미 사에 참여하는 기쁨도 누렸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체포된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 례 고문을 받았다. 관리들은 비천한 신분의 황일 광이 자신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회유마저 거부 하자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한 고문을 했다. 그럼에 도 그는 아무도 밀고하지 않고 이겨내다 이듬해 1월 30일 고향 홍주로 이송돼 참수됐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 교사 비망기」를 통해 “우리 교우들이 이 사람(황일 광)을 공경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교황 성하께 서 그를 제대 위에 올려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 에게 진정한 종교예식을 드리게 허락하여 주신다 면 우리는 너무나 행복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기 도 했다. 황일광의 삶은 인간 존엄과 자유, 평등 가치를 담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얼마나 위대한 지, 당시 사회 변혁에 얼마나 큰 동인으로 작용했 는지를 잘 보여준다.

6 여섯째 마당 - 순교로 믿음의 씨 뿌리다 Ⅳ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

이순이(루갈다)와 유중철(요한)은 세계 교회사에 서도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동정부부(童貞夫婦) 순 교자로서 ‘한국 순교사에서 가장 빛나는 진주’로 불린다. 유중철(요한, 1779~1801)은 전주 초남(현 전북 완 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 으로 태어났다. 부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영향 으로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성장했다. 16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자 신이 살던 초남 마을을 방문했을 때 첫영성체를 했다. 이때 그는 ‘동정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 심을 주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이후 유중철은 동정을 지키겠다고 한 이순이 (루갈다, 1782~1802)와 동정서약을 하고 평생 오누 이처럼 살겠다고 다짐하고 주 신부의 주선으로 혼 인을 했다. 유중철은 동정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 길 때마다 이순이와 함께 기도와 묵상을 하며 이 를 극복해 나갔다.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된 그는 전주 옥에 갇혀 동생 유문석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는 죽기 전에 아내에게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 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순이는 1782년 한양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 부친 이윤하 (마태오)는 당대 학자 이익의 외손으로 1784년 한 국 교회 창설 직후 신앙을 받아들였다.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와 사상의 세례를 받은 이순이는 이미 십대의 나이에 세상의 삶에 연연하 지 않기로 결심했다. 마음속으로는 세상을 버렸지 만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누구보다도 세상 을 잘 살려고 했다. 천상을 지향하면서도 누구보다도 현실에 성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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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이는 179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와 함께 신앙을 지켜나가다 15세가 되던 1797년 동정 생활을 결심했다. 딸의 결심을 들은 어머니는 주 문모(야고보) 신부와 의논했고, 전주 유중철과 맺 어질 수 있었다. 이순이는 다음 해 9월 남편 고향인 전주 초남으 로 가서 살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하면서 시 아버지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한양으로 압송되고 남편 유중철은 전주로 끌려갔다. 이순이도 가족들 과 함께 전주로 압송됐다. 그는 순교를 원했으나 함경도로 유배를 떠나게 됐다. 다시 체포된 이순 이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 고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차분하고 담담하게 겪은 일을 전하고 자신의 죽음을 슬퍼할 이들을 위로한다. “순교를 하게 되면 그 기이함을 어느 순교와 비 교할 수 있겠어요. 다른 성인들이야 응당 할 일을 하신 것이겠지만, 감히 우러러나 볼 순교를 이 보 잘것없는 생명에게 허락하시면 그런 황송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 내 죽은 것을 산 것으로 아시고, 산 것을 죽은 줄로 아시며, 나를 잃은 것을 슬퍼하지 마세요.” 남편 유중철이 순교한 후 1년 뒤인 1802년 1월 31일 친척들과 함께 전주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 교했다. 향년 20세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인 평신도들로 인해 조선사회는 새로워진다. 다시 태어난 다. 천민들도 같은 인간이라는 평등사상이 전파되 고, 이로써 신분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또, 당시까지 한낱 남성의 부속물쯤으로 여겨지던 여성 과 아동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생겨났다. 신앙에 눈을 뜬 평신도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 웃 사랑을 한가지로 여기고 이를 위해 목숨마저 초개처럼 버릴 수 있었다. 2014년 8월 124위 순교자 시복식에서 프란치스 코 교황은 “순교자들의 모범은 막대한 부유함 곁 에서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 많은 일깨움을 준 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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