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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야기] 신학교에 가면 유학도 갈 수 있대
첨부 작성일 2017-11-08 조회 1270

우르바노(Urbano) 신학교 생활 체험기 2

“신학교에 가면 유학도 갈 수 있대”

박정일 미카엘 원로사목자, 전 마산교구장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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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바노(Urbano) 신학교 생활 체험기(1)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 기 위하여’ 장황하게! ‘우리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복음 선교 사명과 그 사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교황청 안에 포교성성(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이 설치되었고, 전 세계 전교지방 신학생 들을 교육하려고 교황 우르바노 8세께서 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그 신학교가 우르바노 교황님의 이름을 따서 우르바노 신학교(아래 사 진)가 되었고, 현재 우르바노 신학교 소재지도 우르바노 교황님의 이 름을 따서 ‘우르바노 8세로’라고 지었다는 데까지 설명하였다.

부모님과 꿈같은 재회를 하고
제주읍을 떠나 부산 영도 신선동본당으로 자 리를 옮긴 신학교에서 우리 신학생들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교수 신부님이 4명 밖에 없었으니 모든 학과 공부를 할 수는 없었지 만, 나는 철학과 1학년에 편입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신학교에서 강의를 받는 것이 처음이어서 참으로 감개무량하였다. 그때에 철학과 학생 은 불과 3명, 철학교수는 오기순 알베르토 신부님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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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일본의 규슈 나가사키시에 있었 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가 운영하는 신학교에 서 수학하신 신부님이었다. 지금도 발행되어 우리에게 낯익은 『성모의 기 사』라는 월간지는 일본 규슈 나가사키시에 있던 꼰벤뚜알 수도회에서 발간하기 시작한 잡지이며, 성 마리아 콜베 신부님이 그 잡지사의 창설자이 시다. 오 신부님께서는, 당신의 교수이었던 콜베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제로서 독일의 아 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동료 수용자를 대신하여 사형을 받은 ‘사랑의 순교자’)를 가끔씩 추모하곤 하 였다. ‘나의 스승은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훌륭한 성인 순교자이 신데 나는 못난 사제 야!’라는 말씀을 하시 며 스승을 그리워하 셨다.

편안하게 신학 교 생활을 하고 있던 1951년 봄 어느 날, 나 는 청천벽력 같은 놀 라운 편지 한 장을 받았다. 허름한 편지지에 연 필로 쓴 여동생의 편지였다. 부모님과 여동생 셋 이 피난에 성공하여 인천에 있는 피난민 수용소 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소식이었다. 나의 「북한 생활 체험 기」 연재에도 썼지만 1950년 12월, 유엔군이 평양 을 점령하고 북진할 때에 나는 서울 신학교 사정 을 알아보기 위하여 고향을 떠나 평양에 나와 있 었기 때문에(나의 고향은 평양 북쪽 약 100리 되는 곳 이다) 부모님과 가족을 만나지 못하고 혼자서 월 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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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방학이 되어 나는 바로 인천으로 달려가 서 부모님과 꿈같은 재회를 하였다. 이 재회가 쉽 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천주교 신자, 성당 이라는 매개체 덕분이었다. 부모님께서 성당(인천 답동)에 찾아가서, 내가 월남에 성공하였다면 신 학교에 갔을 것이라고 믿고, ‘혹시 박정일이라는 학생이 신학교에 있는가?’ 물으셔서 쉽게 이루어 진 것이다. 만일 내가 신자가 아니고 신학생이 아 니었더라면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산가족 상 봉이 어려웠다는 사실을 우리는 2003년에 이루어 진 이산가족 찾기 운동(생방송, 벽보 등)을 통해 잘 기억하고 있다.

“신학교에 가면 유학도 갈 수 있대”
철학과 1학년을 마칠 무렵 나에게는 또 하나의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웃어른께서 나 에게 로마로 유학을 가라고 명하시는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공 부도 공부지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이 어려운 시기에, 만 리타향에서 피난살이 하시는 부모님과 어 린 여동생들을 남겨 두고 훌쩍 멀리 떠난 다는 것이 마음에 걸 렸다. 더구나 나는 8남매의 4남 중 홀로 남은 남 자이다. (그때만 해도 다른 남자 형제들의 생사를 모 르는 상태였다. 바로 밑의 동생은 이북에서 인민군에 끌려갔었기 때문에 그 생사를 알 수 없었고, 두 형님은 피난 도중에 헤어졌다. 당시의 사정은 나의 「북한 생활 체험기」에 상술한 바 있다.) 더구나 어렵사리 재회한 지도 몇 달 안 되는 이때에 다시 이별이라니…….

그러나 곰곰이 생각한 끝에, 교회의 가르침대로, 사제는 가족을 떠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새기며, 웃어른의 명을 순히 따르기로 결심하고 떠나기를 결심하니 마음도 편하였다. 그러면서 중학교 시 절 어느 여름 밤 지금은 수녀인 동갑내기 사촌 여 동생이 나에게 했던 “신학교에 가면 공부를 많이 한대. 그리고 유학도 갈 수 있대. 너도 신학교에 가면 좋겠네.”라는 말이 떠올라 회심의 웃음을 짓 기도 했다.

셋이 함께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셋 중 맏형 이었던 부산교구 허인 바오로는 로마에서 중도하 차하여 귀국한 뒤 외국어대학교의 이태리어과 교 수로 재직하였으며,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이태리 어 사전을 펴내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소식이 끊 겨 근황을 알 수 없어 아쉽다. 또 하나의 다른 신 학생은 대구대교구 김영환 베네딕토(사제가 되어 귀국하여 신학교 교수, 학장을 지냈고 몬시뇰로 서임 되었는데 2000년에 선종하였다.), 그리고 나였다. 본 래 우리는 1951년에 떠나기로 예정이 되었는데 정 부에서 여권을 내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1년을 기 다린 후 1952년에 비로소 여권을 받아 출국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출국 날짜가 다가왔다. 어떤 가방에 무 슨 물건을 넣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에 지참할 수 있었던 것은 미화 100달러뿐이 었다. 부산 수영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탔다. 일반 버스도 타 본 적이 없는 처지었는데, 비행기를 타 고 외국으로 간다니 꿈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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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2시간도 안 되어 도쿄 하네다공항에 도 착하여 입국 수속을 하는데 5년여 만에 일본어 를 들으니 쉽게 알아듣기는 하지만 말을 하려니 잘 나오지 않고 한국말이 튀어 나오곤 하여 속으 로 웃었다. 세월의 무상함과 한국의 해방과 세태 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체험이었다. 누군가의 출 영을 받아 일본 교황대사관(당시에 한국에는 교황 대사관이 없었고 일본 교황대사가 한국 교황대사도 겸 하였다.)에 인도되어 환영을 받고 대사관에서 만 찬을 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주교님과 식 사를 해본 적이 없는 처지었는데 외국인 교황대 사와 식사(그것도 한식이 아닌 양식)를 하게 되니 얼 마나 조심스러웠던지……. 서양에 가면 음식 예의는 어떻다는 이야기를 미리 듣고 있긴 하였지만…….

다음날, 8월 15일 밤 11시 몇 분인지 기억이 안 난다. KLM 항공사 비행기로 도쿄 하네다공항을 출발하였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비행기가 공중 을 날고 주변이 조용해졌을 즈음 나의 머리를 주 마등같이 스쳐가는 상념의 연속……. 많은 파란 끝에 북한 덕원신학교에 입학하였던 일, 덕원신 학교의 강제 폐쇄와 귀가, 서울신학교에 가기 위 한 월남 감행과 해주에서의 2개월간의 유치장 생 활, 6·25 발발, 그리고 다시 20일간의 도보 피난 월남과 제주도와 부산 영도 신선동에서의 피난 신학교 생활 등등…….

1952년 8월 17일 로마에 내리다
비행기는 홍콩과 태국의 방콕, 파키스탄 카라 치에 정박하여 급유하고 로마 참피노(Ciampino) 비행장에 도착한 것이 로마시간 17일 아침 9시였 다. 지금은 12시간에 주파하는 거리를 장장 25시 간이 걸린 셈이었다. 어리둥절하며 비행장에 내리니 선배 신학생 백남익 디오니시오(대전교구 신 학생, 후에 귀국하여 훌륭하게 사목하였고, 몬시뇰로 서임되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가 마중 나와 우 리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우리 일행의 기쁨 은 이루 헤아릴 길이 없었다. 안도와 함께 긴장했 던 긴 여행의 피곤이 싹 가시고 기쁨과 표현하기 어려운 희망이 마음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운전 기사와 유창한 이태리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서 과연 나도 저렇게 이태리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앞섰다.

참피노 공항에서 로마시내까지는 약 1시간의 거리였다. 우선 우리가 공부하게 될 우르바노 신 학교에 들렀다가(여름방학 중이었기 때문에 신학생 들은 모두 별장에 가 있었고 학교는 비어 있었다. 신학 생들은 방학 동안에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라 는 작은 도시 주변에 있는 별장에서 지낸다.) 건 물 밖 구경만 하고 우리는 바로 베드로 대성전으 로 향하였다. 말로만 들었던 베드로 대성전, 교황 님께서 계시는 곳, 우리 교회의 대본산! 가슴이 울렁거리고 뛰었다. 우르바노 신학교에서 베드로 대성전까지는 불과 1킬로미터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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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0만 명이 운집할 수 있는 광대한 광장과 150미터 높이의 웅장한 대성전 앞에 선 우리들은 놀라움과 감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성전 안에 들어가 보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이 안 난다. 성당 내부의 웅장함과(대성전 내 부의 길이가 130여 미터나 된다.) 화려함이 너무나 상상을 초월하여 정신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대성전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바로 별장이 있 는 카스텔 간돌포로 갔다. 장상들은 물론 동료 신 학생들의 환영이 대단하였다. 우리의 도착은 보 통 다른 새로운 학생이 학교에 도착하는 것과는 좀 다른 경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뉴스를 통 해서 학생들이 모두 한국의 비참한 동족상쟁의 6·25 전쟁에 대하여 알고 있었고, 그뿐만 아니 라, 우리가 여권을 받지 못하여 1년을 기다리고 겨우 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정도 미리 알고 있었 던 터에, 우리가 도착하였으니…….

바로 우리에게 각각 방학 동안 지낼 방이 배정 되었다. 자그마한 아담한 방이었다. 침대, 옷장, 세면대까지 있었다. 나는 무심히 세면대의 수도 꼭지를 틀어보았다. 물이 쫙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빨리 잠가야지.’ 하며 물 꼭지를 잠갔다. 불현듯 신선동 피난 신학교에서 아침에 일어나 세숫대야를 들고 도랑물을 받아 세수하던 생각이 무의식중에 작용했기 때문이었을까! 이렇게 나의 우르바노 신학교 생활은 행복하 게 시작되었다. 아직 방학 중이었고 개학이 9월 중순이니 약 1개월의 시간 여유가 있어서 휴식을 취하고 이태리어 공부도 천천히 할 수 있어서 좋 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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