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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년 겨울 / 계간 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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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집]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첨부 작성일 2018-04-25 조회 772

한국평협 설립 50주년 맞이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정리 서상덕 편집위원

 

 

“하느님의 대답, 응답을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 모두가 순교 성인들의 참다운 삶·순교 정신을 공부하면서 우리의 삶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Ⅱ. 순교 역사 속 평신도

“예수님에 대한 진리는 한국 땅에도 왔습니다. 그것은 중국에서 가져온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매우 신기하게도 하느님 은혜는 여러분의 선조들을 당초에는 하느님 말씀의 진리에 대한 지성적 탐구로 이 끌었다가 그 다음에는 부활하신 구세주에 대한 산 믿음으로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에 더 깊이 들어가기를 갈망하던 여러분의 선조들은 1784년에 자기들 가운데 한 사람 을 북경으로 보냈고 그는 거기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좋은 씨앗으로부터 한국에 첫 그리스도공동체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평신도에 의해서만 세워졌다는 점으로 보아 교회 역사에서 유일한 공동체였습니다.

 

이 신생 교회는 아직 어리면서도 믿음에는 그토록 굳세어 몹시 사나운 군란을 거듭거듭 견디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세기도 채 못 되어 1만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를 자랑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1984년 5월 13일자에서).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식 때 거행된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을 주례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목소리는 감격에 겨워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이 아닌 곳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시성식. 그 자리에서 교황은 ‘평신도’, ‘순교’라는 말을 수없이 입에 올렸다. 그만큼 한국 교회는 이 두 단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을 지낸 고(故) 최석우 몬시뇰은 “순교자 성인은 그 시대가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답”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대답, 응답을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 모두가 순교 성인들의 참다운 삶·순교정신을 공부하면서 우리의 삶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고도 했다.

 

 

일곱째 마당 - 순교로 믿음의 씨 뿌리다 Ⅴ

유대철 베드로(1826-1839)

 

1839년 4월 18일(음력 3월 5일)에 시작돼 그해 11월 23일까지 이어진 기해박해는 4대 박해 중 가장 많은 70명의 성인을 낸 역사로 신앙 후손들에 게 아로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 유대철 베드로는 이 시기 70위 성인 가운데 백미 같은 존재다.

 

“이런…? 이런 정신나간 놈!”

숯을 입에 처넣겠다는 엄포를 놓고 부젓가락 으로 시뻘건 불똥이 튀는 숯덩이를 집어들던 옥사장은 유대철이 태연하게 입을 벌리자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에이, 독한 놈. 꿈에 볼까 두렵네.”

흙을 털고 일어선 옥사장은 유대철을 뚫어지도록 쳐다보다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자리를 피했다.

‘뭔가 잘못된 게야, 뭔가…….’

 

옥사장의 머리에서는 이런 생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대철은 열셋이라는 어린 나이로는 상상도 못할 고문을 여러 차례 견뎌낸 터였다.

문초 14회에 14차례의 고문을 당하는 동안 태형(笞刑)을 600대도 넘게 맞고 곤장 가운데 가장 크다는 치도곤(治盜棍)도 마흔 대 넘게 맞았으니 제자리에 붙어 있는 뼈가 없고 살이 헤어질 대로 헤진 몸은 그야말로 피투성이였다.

또다시 형리들이 달려들어 옷을 벗기고 허벅지살을 뜯어내는 고문을 해댔다.

“이놈, 이래도 천주교를 믿겠느냐?”

“믿고말고요. 그런다고 제가 천주님을 버릴 줄 아세요.”

 

아무리 고문을 해대도 대철의 얼굴에서는 평화스런 표정이 스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철이 제 몸에 헤어져 매달려 있던 살점을 떼어내 관장 앞에 던지자 이를 지켜보던 관원들 사이에는 두려운 기색이 떠올랐다.

지난여름, 역관이던 아버지 유진길이 잡히자 자청해 포도청을 찾은 후 이어지고 있는 고문은 그렇게 한철을 넘기고 있었다.

관헌들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군중이 자극을 받을까 두려워 감히 공공연하게 처형하지 못했다. 대철이 고문을 못 이겨 죽을 줄 알았던 것이다.

 

가을조차 한 고비를 넘기려는 10월 31일, 대철의 가련한 몸뚱이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던 옥사 안으로 검은 그림자가 쑥 들어 왔다. 형리는 이내 대철의 목에 줄을 감아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아물아물해져 가는 대철의 눈앞 에는 숱하게 그리던 나라가 다가오고 있었다. 줄에서 풀려난 그의 얼굴에서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갖은 고문과 회유를 기적과도 같은 용기로 이겨낸 유대철은 한국이 낳은 성인 중 가장 어린 13살의 나이로 성인 반열에 들게 됐다.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에 앞서 1984년 5월 4일 광주를 방문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강 론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한국 천주교 신자로서 이 사명을 다하는데 있어 여러분을 받쳐주고 이끌어주고 고무시킬 훌륭한 유산을 이어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조상은 숱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신앙을 찾았을 뿐더러 많은 경우 유민으로 살면서도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이를 남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정하상 바오로의 지칠 줄 모르는 사도직 수행이나 어린 유대철 베드로의 순전한 용기를 보면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교황에게도 그리스도에 대한 꺾일 줄 모르는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겨낸 유대철 베드로의 삶은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여덟째 마당 - 순교로 믿음의 씨 뿌리다 Ⅵ

이성례 마리아(1801∼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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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례 마리아.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 교회가 길러낸 여성 평신도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이를 꼽는다면, 그 가운데 빠 지지 않을이가 이성례 마리아일지 모른다.

 

이성례 마리아는 충청도 홍주현에서 태어났다.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사촌 누이 인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씩씩 하고 총명했던 그는 17세 때 최경환과 혼인해 홍 주 다락골 새터에 살면서 21세 때 최양업을 낳았다. 그 뒤로도 슬하에 다섯 자녀를 뒀다. 나이 어린 남편을 공경하고 순종하면서 지혜롭게 가정을 꾸렸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한양으로 이주했으나, 박해의 기미가 보이자 강원도 금성현(현 김화군), 경기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일대) 등지로 옮겨 다녀야 했다. 그동안 맏아들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났다.

 

신앙 때문에 모든 재산과 고향마저 버리고 낯선 타향으로 전전하며 궁핍한 삶을 살았지만 이성례는 기쁘게 이겨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 칭얼거릴 때면 요셉과 마리아 성가정이 이집트로 피난하던 이야기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른 이야기를 들려주며 인내의 덕을 갖추도록 독려했다.

 

수리산에 정착한 뒤로는 남편을 도와 교우촌을 일구는 데도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1839년 닥친 기해박해는 피하지 못했다. 박해가 본격화되자 남편 최경환은 한양을 오가며 순교 자들의 시신을 수습했고 그는 그런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자녀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중 포졸들이 수리산 교우촌으로 들이닥쳤다. 부부는 음식을 준비해 포졸들을 대접한 뒤 어린 자녀 다섯을 데리고 교우 40여 명과 함께 한양으로 향했다. 포도청에 압송된 이성례는 젖먹이 와 함께 갇혀 고문을 당해야 했다. 300대 이상의 곤장을 맞으며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지는 고통을 견뎌냈다. 하지만 굶주리는 갓난 아이를 지켜보는 고통은 그를 흔들리게 했다. 배 교를 선택해 집으로 돌아가고 만다.

 

하지만 장남이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다시 체포돼 형조로 압송된다. 함께 갇힌 교우들의 권면으로 용기를 낸 그는 배교를 거두고 젖먹이를 하느님께 바치고 순교의 길을 걸어간다.

 

1840년 1월 31일 서울 만초천 하류 당고개. 칼 앞에 선 이성례는 그 순간 무엇을 떠올렸을까. 당고개로 끌려오기 직전 젖도 물리지 못한 채 죽은 막내 스테파노였을까? 이국땅에서 사제가 되기 위 해 정진하던 맏아들 최양업(토마스)이었을까?

 

최양업이 마카오로 떠난 뒤 둘째 최의정(야고보) 등 자녀들에게 남긴 그의 마지막 유언이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전」을 통해 전해온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님과 성모님을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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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위 복자 전체도 “새벽 빛을 여는 사람들”.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처음부터 굶주리는 젖먹이를 뿌리치고 순교했다면 그는 일찌감치 성인이 됐을 뿐 아니라 ‘위대한 순교자’로 남았을 것이다. 젖먹이 막내아들 때문에 배교까지 할 정도로 모진 육정을 끊지 못했 던 복녀 이성례 마리아는 그 모정까지 하느님께 봉헌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신앙선조들의 열절한 순교의 삶은 시간을 뛰어 넘어 오늘날에도 벅찬 감동을 전해준다. 순교자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믿음은 사랑이 헤퍼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일깨움을 준다.

 

“한국 순교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11)”(1984년 5월 6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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