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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평신도
  • 2017년 겨울 / 계간 58호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보고, 아들의 마음으로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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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니픽션] 깊고 눈부신 어두움
첨부 작성일 2018-04-25 조회 693

깊고 눈부신 어두움

- 야고보란 이름의 사나이

 

구자명 임마쿨라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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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자꾸 몸을 뒤채었다. 독수리 발톱처럼 심장을 움켜쥐고 조여오는 두려움의 악력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웃음 띤 얼굴로 그리도 의연하게 헤로데의 판결에 응했던 그였다. 그는 자신이 누운 돌 침상 아래 어딘가에 놓여 있을 포도주가 든 가죽자루를 얼핏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초저녁에 밥을 넣어주러 온 간수는 슬그머니 자기 허리춤에서 술 자루를 끌러 던져주며 말했었다. “새벽을 위해 준비해 두게.” 한때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며 스승의 염려를 샀던 그가 제 급한 성미에 걸맞게 사도들 중 제일 먼저 스승 곁으로 가게 될 참이었다.

 

그는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천근같은 몸을 일으켜 자기 안의 빛마저 위협하는 적대적인 어둠과 정면으로 대좌했다. 지하 감옥의 밤은 무한 암흑과 절대 고독의 공간이었다. 어둠의 정령들이 그들의 가장 비극적이고 불온한 춤사위를 펼치는 곳이었고, 체념을 부추기는 허망의 탄식에 어설픈 희망의 찬가 따윈 맥없이 자리를 내어주는 곳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는 한없이 두렵고 외롭고 서러웠다. 그의 입에서 신음 같은 절규가 새나왔다.

 

“스승이시여, 굽어보고 계시나이까!”

 

그 순간 어둠의 장막을 뚫고 어떤 낯익은 장면 이 하나의 환영처럼 홀연히 떠올랐다. 카야파의 무리들에게 잡혀가던 날 밤 겟세마니에서 기도하던 스승의 모습.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토로한 후 다시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셨다.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아버지!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하지만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때 이루 말할 수 없는 번민의 절정에서 숯이 되어버린 그분의 존재가 뿜어내던 불꽃, 그 불꽃의 그림자, 그 그림자의 광휘, 그 광휘 속의 검은 핵, 깊고 눈부신 어둠이던 스승의 고통……. 그 때는 놀랍고 어리둥절해 설명할 길 없었던 그것이 무엇인지 이제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가장 짙은 어둠만이 품고 있는 빛의 약속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침상 아래에서 포도주 자루를 찾아 들었다. 언젠가 스승이 물으셨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이어 스승은 예언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이 그 잔을 마실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며 포도주 자루를 열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미소가 희게 빛났다.

 

새벽 세 시경 횃불을 들고 사형수를 데리러 지하 감옥으로 내려온 간수와 사형 집행인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는 죄수가 있는 방으로부터 이 상스런 빛이 흘러 나와 복도 전체를 비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등을 보이며 침상에 엎드려 있는 죄수의 검은 실루엣에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몽환적인 광채가 번져나와 온 방에 은하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날 그의 순교를 지켜본 알렉산드리누스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으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곧 그의 뒤를 따라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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