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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년 봄 / 계간 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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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집]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첨부 작성일 2018-04-26 조회 867

한국평협 설립 50주년 맞이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정리 서상덕 편집위원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원컨대 우리 대한의 모든 동포와 형제자매들이여, 크게 깨닫고 용기를 내어 지난날의 죄와 허물을 깊이 참회하여 천주님의 아들로서 현세를 도덕시대로 바로잡고, 더불어 태평을 누리면서 죽어서는 천당에 가서 상을 받아 다 같이 무궁한 영복을 누리기를 천만 바라는 바입니다.”

(안중근 의사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서)


외세의 침탈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반도에서는 민족의 혼과 함께 복음의 빛도 사그라지는 듯 보였다. 악한 세력의 침범과 탄압을 물리쳐 온 한민족의 역사는 그대로 이 땅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역사가 되었다. 그러한 역사가 또 한 번 분수령을 맞은 것이 일제강점기였다. 면면히 이어져 오던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신앙마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때, 믿음으로 한반도를 지탱해 온 두 기둥을 지켜낸 이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민족’은 둘이 아니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함께 누려야 할 한 형제였다.


외세에 맞서 독립을 지켜낸 혁명가이기에 앞서 주님이 보여주신 평화의 길을 좇아간 ‘평화의 사도’ 안중근(토마스)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기쁜 소식이 무엇인지 들려준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 그 진리가 당신 뜻대로 실현되는 평화로운 세상이 바로 그가 간절히 소망하고 함께 누리고자 했던 이상향이다. 그를 오늘에 되살리는 길은, 목숨마저 초개처럼 가벼이 여기며 그가 걸어간 평화의 길을 복원시키는 것뿐이다.

 

 

아홉째 마당 – 순교로 믿음의 씨 뿌리다 Ⅶ

안중근 토마스(1879-1910년)


개인·사회 총체적 구원 바란 선각자
온전한 평화 갈구한 ‘평화주의자’

안중근(토마스) 의사에게는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중근은 여전히 의사(義士) 안중근일 뿐이지 신앙인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아직도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안중근 의사가 신자였어?”라고 되묻는다. 안 의사가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물론 교회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음에도 그간 무관심 속에 방치하다시피 해 온 현실을 잘 보여준다.

 

한국교회사연구소 노길명 고문(고려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은 “안중근 의사는 신앙심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노 교수는 “안 의사는 인간의 영혼과 육신, 현세와 내세, 그리고 개인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구원시키고자 하는 신앙을 갖고 있었던 선각자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간 한국 교회 차원에서 신앙인 안중근에 대한 연구와 현양이 지속적으로 이뤄지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실제 안중근 의사의 뜻을 기리는 추모미사도 안 의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79년 9월 2일 서울대교구 명동 주교좌대성당에서 봉헌된 것이 처음이다.


신앙인 안중근을 학문적으로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도 1990년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안중근 의사 추모자료집’을 간행한 것이 기점을 이룬다. 이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1993년 ‘안중근의 신앙과 민족 운동’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간헐적인 노력이 있어 왔지만, 신앙인 안중근의 상을 한국 교회의 토양과 영성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내왔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안 의사를 모범적인 신앙의 사표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황종렬(레오) 대구가톨릭대 신학과 겸임교수는 “안중근 의사의 신앙과 민족의식의 통합, 아시아의 평화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가는 흐름이야말로 이 시대 한국 교회의 신앙살이 방식을 보다 더 건강하게 구축해 나가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의 의인’ 안중근
안중근은 고려 후기 충렬왕 때 성리학을 전래한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26세손으로 1879년 9월 2일(음력 7월 16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首陽山) 아래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성녀 마리아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兒名) 겸 자(字)는 응칠(應七)이다. 7세 때(1885년) 부친 안태훈을 따라 일가 70~80명과 황해도 신천군 두라방 청계동(淸溪洞)으로 이주했다. 16세 때(1894년) 1살 위인 김아려(金亞麗, 1878-1946년)와 혼인해 2남 1녀를 두었다.


1897년 1월 11~12일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 한글명 홍석구) 신부로부터 도마(Thoma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당시 안중근 일가는 물론, 청계동 주민 모두가 한꺼번에 천주교에 입교해 산간의 이 마을은 한날한시에 교우촌으로 거듭나게 됐다.


천주교 입교 후 안중근은 홍 신부로부터 열심히 교리를 배우는 한편, 불어도 익혀 누구 못지않은 독실한 신앙인의 길을 걸어갔다. 청계동 본당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면서 홍 신부를 수행해 황해도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활동에 투신하였다. 그 무렵 안중근은 청계동을 사목 방문한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를 해주까지 수행하는 역할을 맡는 등, 누구나 인정하는 돈독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였다.


안중근은 1906년(28세 때) 가족을 데리고 청계동을 떠나 평안도 진남포로 이주했다. 이 무렵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아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진남포 본당에서 운영해 오던 돈의학교(敦義學校) 재정을 부담하며 제2대 교장에 취임해 교육을 통해 민족의 길을 밝히려 애썼다. 또 본당에 설치한 야학교인 삼흥학교(三興學校)의 재정도 맡았다. 이러한 노력 모두 신앙을 통해 민족의 미래를 열어가려는 모색으로 읽힌다.


1907년 1월 31일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자 이 운동의 관서지부(關西支部)에서 활동하며 민족의 삶을 옥죄어 오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다. 평화적인 모색을 통해 민족의 미래에 평화를 맞아오려는 그의 모색은 끊임없이 좌절을 맛봐야 했다. 그러한 거듭된 좌절 끝에 그는 무력 투쟁의 길에 나섰다. 신앙에 바탕한 인간적 고뇌 끝에 다다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907년 겨울, 안중근은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로 건너가 그곳 한인사회의 유력자들을 대상으로 의병부대 창설을 위한 설득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이범윤(李範允)의 동의를 받아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했다. 1908년 초에는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무기, 자금 등을 확보해 국외의병부대(國外義兵部隊)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총독에는 이범윤, 총대장에는 김두성(金斗聖)을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중장(參謀中將)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의병과 무기 등을 비밀리에 수송해 두만강 근처에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도모했다.


이 시기 안 의사는 수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 군경과 싸우는 등 독립투쟁을 벌였다. 그런 중에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민족의 원수, 동양 평화의 적 이토를 몸소 처단하고자 결심했다. 1909년 10월 21일 동지 우덕순·유동하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하얼빈에 도착해 거사를 준비했다. 그는 거사에 앞서 원흉에게 안길 총알에 십자가 표시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하느님께 거사의 성공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드디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동양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렸다.


의거 후 안중근은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서 검찰관의 심문을 받으며 당당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죄로 고종 강제 폐위와 명성황후 시해,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 등 15개 항목을 열거했다. 옥에 갇혀 심문을 받고 있을 때, 이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호를 그으며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감사 기도를 드렸다.


1909년 11월 3일 안 의사는 한겨울 삭풍이 매서운 뤼순(旅順) 감옥으로 옮겨져 수감됐다. 1910년 3월 15일, 다가오는 죽음을 직감한 안 의사는 3개월 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서둘러 마무리하였다. 특히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기 위해 상고도 포기하고, 사형 집행을 보름 정도 연기해 달라고 탄원했으나 묵살됐다.


이 무렵 안 의사가 갇혀 있는 감옥에 관계하던 많은 일본인이 그에게 붓글씨를 써달라고 부탁해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등의 유묵 200여 점을 남겼다. 사형을 앞둔 시점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장엄한 처신이었다.


1910년 3월 26일. ‘하얼빈 의거’ 5개월 만에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되는 날, 뤼순 감옥 형장은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조선인과 중국인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형장으로 나서기 전 일본 검찰관이 안 의사에게 마지막 유언을 물었다.


“당신들이 동의한다면, 이 자리에서 ‘동양 평화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오.”


그러나 일제는 그의 마지막 요청마저 묵살했다. 오전 10시 사형 집행을 알리는 신호가 울렸다. 신앙인 안중근은 하루 전날 동생 정근(定根)과 공근(恭根)이 면회할 때 건네준, 어머니와 아내가 밤새 지은 한복을 입고 의연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성녀 마리아가 아들 안 의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한 대목이다. 신앙 안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자신들이 걸어갈 길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유해는 끝내 유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안 의사의 죽음이 민족 독립운동의 새로운 도화선이 될 것을 염려한 일제가 몰래 빼돌린 것이다. 100년이 지난 세월,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서울 효창공원엔 그의 가묘만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의연히 죽음을 향해 걸어간 신앙인 안중근 토마스가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어 한 소망이 ‘동양 평화’다. 그가 갈구한 평화가 이뤄진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걸어간 평화의 길이 하느님께 바치고자 한 길임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믿음의 등불이 사그라져 가던 시대, 신앙인 안중근은 평신도 사도직의 전망을 새롭게 열어젖힌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그의 신앙 실천과 고통 받고 있던 민족에 대한 사랑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소중한 신앙 자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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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순 감옥                                              ▲ 빌렘 신부 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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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뤼순 감옥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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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의학교 교장 시절        ▲ 부인과 두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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