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보기서울평협 바로가기
> 계간 평신도 > 웹진
계간 평신도
  • 2018년 봄 / 계간 59호
    평신도 희년과 부활의 기쁨, 평화, 사랑이 온 누리에
    PDF 다운로드
제목 [나눔] 부모님, 내 신앙과 성소의 은인
첨부 작성일 2018-04-26 조회 842

나의 신앙 선조
부모님, 내 신앙과 성소의 은인
손희송 베네딕토 / 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

 

 

 

고향과 부모님
나는 조상 대대로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이른바 구교우 집안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사흘 만에 유아세례를 받았다. 조상님들 중에는 한국천주교회 초기의 순교자도 계셨다고 하는데, 자료가 없어서 그분이 누구인지는 현재까지 밝혀내지 못했다
.


내 고향은 경기도 북쪽의 작은 마을 연천이다. 본래 우리 가족은 현재 원주교구 풍수원 본당 관할 지역에 뿌리를 두고 살았다. 우리 가족은 1956년 경기도 연천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거기서 내가 태어난 것이다. 연천은 38선 이북에 위치했기 때문에 1945년 해방 당시에는 이북에 속해 있던 지역이었지만, 6·25 전쟁 이후에는 대한민국에 속하게 된, 이른바 수복(收復) 지역이다.


내가 태어날 당시에 연천에는 본당은 물론 공소조차 없었다. 부모님은 연천으로 이사 온 직후에 서둘러서 당시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본당인 의정부 성당을 찾아가서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고, 신부님의 방문을 청하셨다. 그래서 연천 공소가 시작되었고, 아버님이 초대 공소 회장으로 임명을 받아 1970년 작고하실 때까지 회장 직무를 맡으셨다. 그 이후에는 어머니가 공소 회장직을 물려받으셨다. 1971년 9월에 연천 공소에 강당을지었는데, 그때까지 주일에 신부님이 오시면 우리 집 안방에서 미사를 드리고는 하였다.


부모님은 교육을 많이 받은 분들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만 졸업하시고, 어머니는 야학에서 한글을 배워 깨우치셨다. 두 분 다 구교 집안 출신으로서 경제적으로 빠듯한 생활 속에서도 신앙생활에는 철저하셨다. 자식들의 학교 공부보다는 신앙 교육에 신경을 더 많이 쓰신 분들이었다. 늘 ‘착하게 살라.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자랐고, 기도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내가 초등학교 1,2학년 정도였을 때 공부 때문이 아니라 기도를 하지 않아서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았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런 부모님 덕분에 기도가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성소의 씨앗
내 고향 연천은 교육 환경으로 보면 그리 이상적인 곳은 아니었다. 휴전선이 가까운 전방지역이라 주변에는군부대가 많았고 술집과 다방도 많았다. 성당도 없고 신자들도 매우 적었던 그곳에서 내가 사제의 꿈을 키울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부모님 덕분이다.


우리 집이 공소였고 부모님은 신부님을 무척이나 공경하던 분들이라서 이런저런 계기로 신부님들이 많이 오셨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많은 신부님들을 보면서 자라왔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부모님은 내게 ‘신부가 되라.’고 부드럽게 권고하시고는 했다. 또 집에 들르시는 신부님들로부터도 ‘너 이다음에 커서 신학교 가라.’는말씀을 많이 듣고는 했다. 아마도 이런 은근하고 지속적인 권고가 사제성소의 씨앗이 된 것 같다.


한번은 어머니가 ‘우리같이 변변치 못한 집에서 어떻게 사제가 나올 수 있겠느냐.’고 하시자 아버지가 이렇게대답하셨다고 한다. “그런 소리 말아. 지금 교황님도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나오셨어.” 당시 교황은 1958년에 선출된 요한 23세로서 이탈리아 북부의 가난한 농부 집안 출신이었다. 전체적으로 부모님의 권유와 기도, 우리 집에 들르셨던 여러 신부님들의 권고 덕분에 나에게는 자연스럽게 사제직에 대한 원의가 싹트게 되었다그래서 이미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사제가 되겠다고 결심을 하였고, 이 결심은 변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에도 나는 아예 신부가 될 사람으로 자타가 인정하였고, 초등학교를 마치고 소신학교(성신중학교)에 입학하기로 계획을 하지만 1968년에 갑자기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고 추첨제로 바뀌면서 지방에서서울로 진학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소신학교의 중학교 과정이 폐지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중학교는 고향 마을에서 다녀야 했다.


연천은 작은 마을이라서 중학교도 한 학년에 4학급밖에 없었다. 1, 2반은 남자 반, 3반은 남녀 합반, 4반은 여자 반으로 구성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3학년 내내 남자들만 있는 1반이나 2반에 속하여 있었다. 중학교 때에도 신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마음은 변화가 없었다. 같은 반의 동료들도 내가 신부가되려는 것을 다 알고 있었고, ‘네가 신부 되면 내가 송아지 한 마리 사 주겠다.’고 장난스럽게 내기를 거는 친구도 있었다.


한창 사춘기 때인 만큼 여학생들에게 끌리는 마음이 없을 수는 없었다. 이에 대한 방어기재가 발동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신부가 되려고 하고, 신부는 일생 독신으로 살아야 하니까 지금부터는 여자들과 가능한 한 상대를 하지 말자.’는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중학교 3년 동안 여학생들과는 만나거나 얘기하는 것을 일부러 피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자연스럽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행동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꽤나 진지했다.

 

 

 

작은 위기
중학교 3년을 마치고 드디어 서울에 있는 소신학교(성신고등학교, 1983년 폐교됨)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작은 위기가 있었다. 사제가 되고자 하는 나의 마음은 변치 않았지만, “신학교에 한번 들어가면 신부가 돼야지 나오면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그만 걸림돌이 되었다. 남자가 한 번 품은 뜻은 어떻게 해서든 이루어야지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뜻의 말씀이었는데, 당시 사춘기에 있던 나에게 묘한 반항심리가 발동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신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누가 아느냐, 중간에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않느냐, 그렇게 못을 박아 놓으면 부담이 가서 어떻게 생활하느냐.’고 대꾸를 했다. 단순한 분이신어머니는 ‘그러면 네게는 성소가 없나 보다. 그런 정도의 약한 마음이라면 아예 그만두라.’고 잘라 말씀하셨다. 두말없이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해 놓고, 얼마 동안은 그곳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공무원이나 교사가될까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나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하신 어머니께서는 큰형에게 이런 사실을 털어놓게 되었고, 큰형이 중재에나섰다. 어느 날 형이 나를 부르더니 “네 말도 일리가 있다. 어머니는 내가 설득할 터이니 원하는 대로 신학교에 가면 좋겠다.”고 했다. 다행히 서로 간에 합의가 이루어져서 1972년 봄에 소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성소의 길로 접어들었고 그 이후에도 성소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나 갈등은 거의 없었다. 성소의길이 너무 순탄하고 자연스럽기까지 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한때는 ‘내 성소의 길은 너무 밋밋해서 얘기할 것이 없네. 뭔가 좀 극적인 것이 있었더라면 좋을 뻔했는데…’ 하는 불만 비슷한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어린 나이에 성소에 대한 큰 회의나 심한 갈등이 있었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고, 자칫하면 성소를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성소의 씨앗을 심어주신 부모님과 그 씨앗이 순조롭게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릴 뿐이다.

 

 

수호천사
1992년 10월에 10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신부 된 지 6년 만에 본당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았다. 서품 받고서도 계속 유학생활을 하는 통에 보좌 연한이 다 지나서 곧바로 본당 주임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주임이 된 것은 좋지만, 본당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주임이 되니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많았다. 게다가 본당 발령 받은 지 6개월 정도 지나서 대신학교에 출강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 어머니가 사제관에 계시면서 살림을 도와주셨는데, 본당의 사목 업무와 신학교 강의 때문에 바쁘게 지내는 아들 신부를 늘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계셨다.


어느 날 본당 수녀원의 원장 수녀님이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주일 오전에 우연히 사제관을 지나가다가 사제관 집무실의 창문이 열려 있어서 자연히 방 안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단다. 그런데 내 의자에 누가 앉아있는데, 의자 등받이 위로 뒷머리만 보이더라는 것이다. 마침 그 시간이 교중 미사 시간이어서 주임신부는 미사 집전 중인데, 웬 낯선 사람이 주임신부 방에 들어가 있는 것이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바로 나의 어머니였다. 수녀님이 나중에 어머니에게 왜 그 시간에 아들 집무실에 들어가 계셨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을하셨단다. “아들 신부가 주일이라 바빠서 묵주기도 못 할 것 같아 아들 의자에 앉아서 대신 묵주신공을 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고마운 마음에 가슴이 뭉클하면서, 문득 “아, 어머니가 내게는 수호천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부모님,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사제가 되었고, 지금까지 성직자로서 기쁘게 살아왔다고 확신한다. 어머니는 2014년 9월에 96세의 연세로 선종하시기 전까지 자식들, 특별히 사제인 나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셨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당신이 나를 위해 기도하실 때 사용하셨던 묵주를 주셨다. 아마도 당신 죽음을 예감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가 주신 묵주로 기도할 때면 그분이 나와 함께 기도하신다는 느낌이 든다. 내 신앙의 교사요 성소의 인도자이신 어머니는 지금 하늘에서 이 아들을 위해,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제들을 위해 하느님께 열렬히 전구해 주신다고 믿고 있다.

이전글 한번 우르바노 신학생은 영원한 선교사
다음글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
      


TOP 위로가기
Copyright ©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All Rights Reserved.

04537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80 (명동2가 1) 가톨릭회관 510호
전화 : 02) 777-2013 / 팩스 : 02) 778-7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