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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야기] 한번 우르바노 신학생은 영원한 선교사
첨부 작성일 2018-04-26 조회 1225

우르바노(Urbano) 신학교 생활 체험기 (4)
한번 우르바노 신학생은 영원한 선교사
박정일 미카엘 / 원로사목자, 전 마산교구장 주교

 

 

필자 박정일 주교

 

로마에서는 10월 초순에 대학 강의가 시작된다. 우리 3인 - 허인 바오로(부산교구), 김영환 베네딕토(대구대교구), 나(평양교구) - 은 8월 17일 로마에 도착하여 약 2개월 동안의 방학을 로마에서 약 23km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에 있는 신학교 별장에서 한가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이탈리아어 공부를 할 수있어서 좋았다. 당시 우르바노 신학생들은 방학 기간에도 자기 집으로 가서 방학을 지내거나 여행을 떠날 수 없고,학교 수업만 없을 뿐 신학교 별장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나는 우르바노 신학대학 철학과 1학년에 등록하였다. 영도 피난 신학교(6·25 당시 북한군의 남침으로 서울 신학교가 임시로 제주도에 5개월, 부산시 영도에서 2년 동안 피난한 적이 있다.)에서 1년 동안 한국어로 철학 공부를했지만, 한국에서 라틴어를 전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당시 로마에서는 모든 강의가 라틴어로 이루어졌다.) 신학교 생활을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1학년에 등록하였던 것이다. 라틴어를 배우지 못한 처지에 어려운 철학 강의를 라틴어로 들어야 하니 참으로 어려웠다. 학기 초에는 교수님들의 강의를 거의 알아들지 못하였다. 다행히교수님들의 교본이 있어서 방과 후 사전을 찾아가며 열심이 읽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려웠다. 처음에는 한 페이지를 읽는 데도 한 시간 이상이 걸렸던 것 같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 나니 조금씩 귀가 열리고, 학년말이 되었을 때에는 겨우 낙제를 면하고 2학년에 진급할수 있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논문 외에는 모든 시험이 구두시험이었으며, 라틴어로 교수와 즉문즉답하는 형식이었다. 아마도 교수님이 나이가 들어 보이는(나는 늦게 신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동창생들보다 대개 서너 살 연상이었다.) 동양 학생을 너그럽게 봐주신 덕분이었으리라. 우르바노 신학대학에서는 철학과 2년을 마치고 바로신학과로 진학할 수도 있었고, 3학년을 이수함으로써 철학 석사학위를 받을 수도 있었다. 나는 이왕 늦은 공부에라틴어도 좀 더 익힐 겸 철학 3학년을 이수하여 철학 석사학위를 받고 신학과에 진학하였다. 신학 과정은 4년이다. 신학 석사학위도 취득할 수 있었다. 신학과에 진학하여 사제가 되기까지(1958년 11월 23일 사제 수품) 나의신학교 생활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건강도 양호한 편이었다. 하느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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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광장 포교성성과 신학교 교사 건물 (원주 뒤)
▲ 광장 옆 언덕 위 성삼 성당
▲ 우르바노 신학교 간판

 

우르바노 신학교는 어떤 교구나 수도회가 설립하는 신학교와는 달리, 전 세계 전교지방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1623년 교황청 포교성성(Sacra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 장관이던 우르바노 8세(1623-1644년) 교황께서 설립한 특수 신학교이다. 그래서 신학교 이름이 교황님의 이름을 따서 ‘우르바노 신학교’이고, 학교 소재지도‘로마시 우르바노 8세로 16번’으로 되어 있다. 우르바노 신학교는 약 400년의 긴 역사뿐 아니라, 전교지방의 여러 나라 학생들이 함께 모여 사는 관계로 나름대로 몇 가지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 특성 한두 가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캡처2.JPG

▲ 우르바노 8세 교황

 

그 첫째 특성은 무엇보다도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여러 민족 학생들이 함께 모여 산다는 것이다. 당시 아시아·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전교지방 약 20개국 학생들이 있었다. 흑인종·황인종·백인종(예외적으로 두세 명밖에 없었다.) 등…. 가히 인류 전람회라고나 할까!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 유럽 학생들은 없었다. 가톨릭 국가인 남미의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등의 학생들도 없었다. 그들 나라들은 나름대로 자기 나라 신학교를 로마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구 신학교는 자기 교구 소속 신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수도회 신학교는 자기 수도회 소속 신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하는 신학교이다.)

 

신학교 생활 처음에는 여러 나라 학생들, 특히 흑인들이나 일본(가깝고도 먼 나라!) 신학생들과 함께 숙식하고 생활하는 것이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자연스러워졌고, 더구나 여러 나라의 풍속과 사정 등도 알게 되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더욱이 같은 믿음의 형제들이고, 같은 사제직의 이상을 가지고 교회의 중심지인 로마에서 함께 공부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


다음으로 우르바노 신학교의 특수한 제도 하나가 있는데, - 나의 과문의 소치인지는 몰라도 - 아마 일반 교구나수도회 신학교에는 없는 제도인 카메라타(Camerata) 제도이다. 여러 나라 학생들이 함께 모여 사는 데 꼭 필요한 특수 제도라고 할 수 있다. ‘Camerata’라는 말은 ‘Camera’(이탈리아어로 방, 또는 실[室])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동지, 급우, 동창, 또는 서클’이라는 뜻이다. 전교생이 각각 다른 카메라타에 배정되는데, 당시에 11개 카메라타가 있었다. 각 카메라타에 약 20명이 배정되었다. 그러니까 전교생이 약 200명이었다.


카메라타에 속하는 학생들은 대학에서 수업을 받는 시간 외에는 항상 함께 생활하고 행동하였다. 각자의 방(독방)이 한 건물의 같은 구역에 있었고, 식사 때는 물론 휴식시간과 운동시간에도 항상 같은 장소에서 함께 하였다. 다른 카메라타나 같은 나라 학생과 어울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공용어는 물론 이탈리아어이다. 이는 매우 엄한 규칙이었다. 그러나 주일과 목요일 오후 휴식시간만은 다른 나라 학생들과도 어울릴 수 있고, 같은 나라학생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런 날이면 우리 한국 학생들은 운동장 가에 있는 한곳에 모여 외국 생활의 회포를 푸는 기회를 갖기도 하고, 고국 소식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지금도 그 장소가 눈앞에 선하고 그립다.


우르바노 신학교에는 또한 나름대로의 영적 전통과 특색이 있다. 그 첫째가 철저한 복음 선포 의식이다. 장상들은 학생들에게 복음화 정신을 일깨우는 데 온 노력을 다 쏟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한번 우르바노 신학생은 영원한 선교사!’(Una volta Propagandista sempre Propagandista / Once Propagandist always Propagandist)라는 표어를 자랑스럽게 외치곤 하였다. 세상 복음화를 위해 직접 포교성성이 세운 신학교에 마땅히 있음직한 전통이라고 할까.

 

▲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을 산책하는 학생들

 


우르바노 신학교에 각별한 성모 신심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비의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다. 신학교 대성당안 소성당에 ‘자비의 성모상’ 성화가 모셔져 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성당을 드나들 때마다 그 성모님 앞에서기도를 바치곤 하였다. 그 성모님의 이름을 딴 ‘자비의 성모님 신심회’(Unione di Mater MIsericordiae)가 있었고,내 방에는 항상 그 성모님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다른 하나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무염시태 성모님, 12월 8일 축일)에 대한 신심이다. 이 신심은 각자의개인기도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우르바노 신학교의 전통으로 특수한 것은 카메라타 학생들이 함께 행동을 시작할 때나 모일 때마다 이 성모님께 화살기도를 바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조장이 “Virgine Immacolata aiuteteci!(원죄 없으신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고 선창하면, 다른 학생들이 일제히 복창하고 행동을 시작하곤 하였다. 이 전통은 스페인 광장에 있는 원주 위에 모셔진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대한 신심의 표시가 그 기원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 스페인 광장은 로마에 있는 여러 유명한 광장 중의 하나이며, 본래 스페인 대사관이 옆에 있어서 명명된 광장이다. 광장 옆에 옛 교황청 포교성성과 우르바노 신학교가 현 위치로 이전하기전에 자리하고 있었다. 광장 복판에 우뚝 솟은 ‘원죄 없으신 성모님’을 모신 거대한 원주가 있는데, 1854년 비오 9세 교황께서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반포하신 것을 기념하여 1857년 12월 8일 건립한 것이다. 광장 옆에 유명한 ‘언덕 위의 성삼 성당’이 있으며, 오늘날 이 광장은 로마의 빼놓을 수없는 관광지로 많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 원주 위에 모신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

 


1952년 당시 로마에는 한국 사람이 사제 3명, 신학생 5명, 남자 유학생 1명으로 10명이 안 되었고 되었고, 한국대사관도 없었다. 그래서 가끔 로마에서 국제회의가 있어서 한국에서 회의 참석차 오는 분이 있을 때면 호텔 알선이나 시내 관광 등은 으레 우리 신학생들의 몫이었다. (당시 신익희 국회의장이 한 번 오셨던 것이 기억나고,다른 몇 분도 다녀갔다.) 약 2년 후인 1954년에 비로소 한국 영사관이 개설되어 광복절에는 신학생들도 영사관에 초대되었다. 8·15 기념행사에 참여하고 한국 소식을 듣기도 하고, 특히 한국 음식도 맛볼 수 있어서 좋았다. 오늘날은 로마에 한국 음식점이 여러 군데 있지만, 당시에는 한국 음식점이 하나도 없었다.


당시 로마에 사제로서는 예수회 신부 한 분과 서울교구 신부 두 분(이문근 신부님과 다른 한 분)이 있을 뿐이었다. 한국 성음악의 대가이신 이문근 신부님은 성 체칠리아 음악대학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신학생들 중에는 동방 가톨릭교회인 이집트, 그리스, 레바논, 터키 교회 등에 속한 학생들도 여럿 있었다. 동방교회 예절은 미사와 7성사 등 서방교회 예절과 많이 다르다. 그러나 예절만 다를 뿐, 교황님의 수위권을 인정하는가톨릭교회이다. 가끔 동방교회 예식의 손님 주교님이나 신부님이 오시면 이색적인 동방예식 미사에 참례할 때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체험이었다. 특히 ‘주님 공현 대축일’(옛 삼왕내조 축일. 동방박사들이 별의 인도로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간 고사를 기념하는 축일)이 되면 우르바노 신학교에서는 대대적으로 동방예식으로 미사가 올려져 이색적이었다. 동방교회에 속하는 동기 이집트 학생 중하나가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몇 해 전에 내가 이집트를 방문하는 기회에 만나서 매우 반가웠다.


나의 동기(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등 42명) 중에는 주교로 임명된 사람이 5~6명 된다. 그 중 한 사람이 추기경(나이지리아인 아린제)으로 임명되었는데, 2002년 9월 인류복음화성(옛 포교성성) ‘종교간 대화 평의회’ 의장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어 김수환 추기경님과 함께 자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동기들은 대륙별로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한 번도 동창회를 한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만나본 적이 없어 아쉽다. 더구나 생사의 소식도 잘 알 수 없으니…. 다만 가까운 일본의 나가사키 대교구장이었던 시마모토 대주교는 내가 제주교구장으로 있을 때 방문해 주었고, 나도 나가사키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 아린제 추기경

 

 

잊을 수 없는 추억 한 가지
1950년대에 유럽에 유학하시는 신부님들의 경제적 여건이, 잘 모르겠지만 매우 어려웠던 것 같다. 오늘날은 장학금을 받거나 교구에서 뒷받침하므로 별로 어려움이 없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으니까. 이문근 신부님께서도 생활비의 어려움을 겪으셨던 것 같다. 신부님은 이발비를 아끼기 위해 이발기를 사서 당신이 앞뒤로 거울을놓고 손수 이발을 하셨다. 가끔 이 신부님께서 여름방학 때 우리 신학생들과 함께 소풍가는 기회에 이발기를 가지고 오셔서 나에게 ‘미카엘 이발 좀 해 줘.’라고 하셔서 이발을 해드린 기억이, 나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신부님께서는 양복바지를 직접 만들어 입기도 하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 신부님께서 우리 신학생들에게 성가를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방문하실 때는 으레 군밤(당시에는 로마 길가에 군밤 장사가 있었다.)을 사 가지고 오신 정겨운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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