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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평신도
  • 2018년 여름 / 계간 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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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집]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첨부 작성일 2018-07-08 조회 745

한국평협 설립 50주년 맞이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정리 서상덕 편집위원

 

▲ 서상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과 성모님의 것이다.
내가 모은 재산을 성당에 바치려 한다.
세 분 조상들의 순교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지도가 있다. 이 지도에는 주님이 통치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생생한 모습부터 그분의 나라에 이르는 길이 자세하게 담겨 있다.


성경!
주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저마다 하느님나라 지도를 지니고 있다. 우리를 당신 ‘친구’로 부르신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 내내 우리와 동행하신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4-15)


성전(聖傳)!
성경과 함께 ‘교회에 맡겨진 하느님 말씀의 유일하고 거룩한 유산’을 이루는 전통. 종교개혁의 불길이 유럽 사회를 휩쓸고 있을 때,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에서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진리와 가르침이 기록된 책들과 기록되지 않은 성전들 안에 들어 있음을 안다.”고 결정했다. 구원에 관한 모든 진리와 실천규범이 성서와 성전 안에 ‘들어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성경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그 전통의 진행 과정에서 산출해낸 산물이다. 억압받던 히브리 민족과 사도들의 전통이 낳은 문학적 산물이 바로 성경이다. 따라서 면면히 내려온 전통이 없었다면 성경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전통이 성경을 형성시켰다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고 여러 가지 구체적인 상황에 적응해서 현실화시키는 단계에서도 그 공동체의 전통이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을 성전이라는 본래의 배경에서 분리하여 독립시켜 버리면, 실제에 있어서는 성경이 갖는 본래의 가치와 생명력을 없애버리는 결과가 된다.


이처럼 성전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길을 보여주는 나침반과 같다. 한민족이 격변기를 맞을 때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과 심성을 바탕으로 한국교회의 새로운 ‘성전’의 기틀을 마련한 이들이 있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이들의 걸음은 그대로 한국교회의 역사, 한민족의 역사가 되었다.

 

 

10 열 번째 마당 – 이 땅에 뿌린 하느님 나라의 꿈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50-1913년)


국채보상운동 선구자 새로운 성전(聖傳)을 세우다
쌀밥 보면 눈물부터 흘려

‘아무리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쌀밥을 먹지 않겠다.’


당대 대구뿐 아니라 영남 최고 부자였던 서상돈(아우구스티노)은 쌀밥이 놓인 밥상을 보면 눈시울부터 붉혔다. 어린 시절 아픈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서상돈은 백부 서인순, 숙부 서익순, 서태순 등을 친아버지처럼 여기며 따랐다. 그가 16세 되던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서상돈은 어린 나이에 백부의 옥바라지를 자처했다. 모진 고문에 지칠 대로 지친 큰아버지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피고름이 엉겨 붙은 멍석을 뜯어 먹는 모습을 눈물로 지켜봐야 했다. 막내 삼촌 서태순이 감옥에서 순교하자 피눈물을 삼키며 그의 너덜너덜해진 시신을 지게로 옮겼다.


그처럼 강렬한 원체험이 또 있을까? 그때의 기억이 그의 삶을 위대하게 재탄생시켰다. 어린 상돈은 모진 박해의 한가운데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골고타 언덕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으로 점철된 박해의 와중에 어린 상돈은 결심한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 이 땅에 주님의 집을 짓겠다고, 그리고 아무리 돈을 많이 벌더라도 절대로 쌀밥은 먹지 않겠다고···.

 

신앙이 신앙을 낳아
서상돈은 1850년 10월 17일(음) 부친 서철순(徐哲淳)과 모친 김 아가타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상돈 집안의 신앙은 4대조 서광수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서울에서 살던 서광수는 1784년 이승훈이 중국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되었을 때 여섯 아들과 함께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이듬해인 1785년 을사추조적발 사건 때 연루돼 문중으로부터 파적당하면서 그의 가정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3남 서유오(徐有五, 1760-1807)의 가정이 충청도 장원을 거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들 서치보(徐致輔, 1791-1840)와 손자(인순隣淳, 명순明淳, 철순哲淳, 익순翼淳, 태순泰淳)들이 경북 문경 여우목 교우촌에 들어와 살게 됐다. 박해에 쫓기고 쫓겨 다니다 자리 잡은 터이다 보니 서상돈 가정은 극도의 가난에 주려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선조들이 순교로 지켜낸 신앙은 그의 삶에 오롯하게 새겨져 있었다.


집안 어른들의 순교를 직접 지켜봐야 했던 소년 서상돈은 일찍 철이 들었다. 1859년 9세 때 부모님을 따라 대구로 이사 온 서상돈은 이미 13세 때 가게 점원으로 취직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을 꾸리기 시작했다. 18세 때는 그의 됨됨이를 알아본 이들의 도움으로 보부상을 거쳐 경제인으로 성장해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대구 지역에 가톨릭 신자라고는 몇 집밖에 되지 않을 때였다. 대구는 물론 영남지역에서 손꼽히는 부호가 된 그는 자신의 독실한 믿음과 인격으로 많은 이들을 하느님의 길로 이끌었다. 특히 그는 자선사업에 헌신해 봄과 가을이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수백 석의 곡식을 기꺼이 내놓았다. 가난을 누구보다 잘 알게 한 어릴 적 기억이 배경이 됐다. 그의 이런 자선에 감동해 입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 땅에 새로운 성전(聖傳)을 세우다
서상돈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새겨진 소명이 있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소명은 김보록(Robert, A. J. 金保祿) 신부와의 만남을 통해 본 궤도에 올랐다. 1885년 서상돈의 나이 35세 때 대구지역 전교 책임을 맡은 김보록 신부가 신나무골 교우촌으로 왔다. 상돈은 서태순의 딸인 사촌 여동생 서 마리아와 함께 교회 일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888년 겨울, 김보록 신부는 신나무골에서 대구와 가까운 죽전 새방골로 옮겨 3년간 은신하며 전교활동을 펼쳤다. 낮에는 바깥출입을 삼가고 밤이면 상복으로 변장하고 신자 가정을 찾아가 성사를 주다가 5년 뒤 대구로 거처를 옮겼다.


서상돈은 김보록 신부를 통해 근대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김보록 신부는 조선에 대한 사랑이 유별해 바쁜 사목 중에도 학교를 개설하여 많은 이들에게 배움을 길을 열어 놓았다. 1899년을 전후하여 대구읍내 새방골·대어벌·영천 등지에 학당을 설립할 때, 서상돈은 교회 내 신자들의 힘을 모아 재정 지원과 학교 운영을 도왔다.

 

계산동본당 부속인 한문서당 해성재(海星齋)도 그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날로 발전을 거듭하던 해성재는 1908년 4월 1일,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립학교(聖立學校)로 탈바꿈했다. 이 학교는 2년 뒤 부속으로 야간부인 성립여학교를 설치하는 등 여성 교육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서상돈은 1905년 달서여학교 설립에도 적극 관여했다. 달서여학교는 1909년 학부대신(대한제국 때에 학무행정을 관장하던 중앙관청)으로부터 정식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며, 합리적인 가정생활을 위한 부인 야학회를 운영하는 등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여학교로 발전을 거듭했다.


서상돈이 대구대교구 설정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1911년 교황 성 비오 10세는 이 나라에 하나밖에 없던 교구를 하나 더 늘리기로 했다. 조선교구를 서울교구와 전주교구로 나누고, 서울교구는 충청도 이북을, 경상 전라는 전주교구가 관할토록 할 계획이었다. 서상돈은 이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를 찾아갔다.


“내 나이 갑년입니다. 평생을 교회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생전 꿈이 있다면 프랑스 루르드 지방의 성모를 모신 마사비엘 동굴과 꼭같은 성모당을 주교당 앞에 짓고 싶습니다. 부디 새 교구를 대구에 설립하도록 해주십시오.”


서상돈의 진심 어린 간청에 감복한 뮈텔 주교는 쾌히 승낙했다. 지금 남아있는 대구 성모당은 서상돈이 프랑스 루르드 지방의 마사비엘 동굴과 같은 모양으로 건립하는 데 이바지한 곳으로 교회에 대한 그의 사랑이 담겨 있다.


이후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안세화) 주교가 대구에 부임해 오자 서상돈은 계산동 성당 앞에 있던 누이의 집을 주교 관저로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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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상제막: 2011년 4월 8일 대구대교구 서상돈 선생 흉상 제막식에서

교구장 조환길 대주교(가운데), 전임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조 대주교 오른쪽),

서상돈 선생의 증손자 서공석 신부(부산교구 원로사목자) 등이 흉상을 제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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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8월 6일 서상돈 선종 100주년 추모미사

 

 

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수만 평에 달하는 남산화원 전부를 교구 사업에 기꺼이 내놓았다. 이곳에 대구대교구의 중추라 할 주교관, 신학교, 수녀원, 고아원, 성모의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 등이 들어서게 됐다.


서상돈은 자신의 집 사랑채에 모인 식객들을 수시로 만나 복음을 전하는 등 직·간접적인 전교활동에도 나섰다. 그는 대구 중구 계산동에 집을 지어 많은 식객에게 편의와 안식처를 제공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다. 이에 많은 사람이 감화를 받아 천주교에 입교했다.


서상돈이 우리나라 역사에 새롭게 세운 성전(聖傳)이 있다. 바로 국채보상운동이다. 서상돈은 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서 나라 지키는 일에 앞장선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약했다. 독립협회 제4기 민중투쟁기에는 그가 재무부 과장 및 부장급의 일원으로 눈부신 활약을 했음을 알려준다.


1907년 2월 16일 대구 광문사(廣文社)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마친 뒤,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국채보상운동을 제안했다. 담배를 끊는 등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당시 우리나라가 일본에 지고 있던 국채 1300만원을 갚자는 것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800원을 의연금으로 내놓았다. 200여 명의 다른 회원들도 만장일치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뜻을 모으고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하였다.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등과 함께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皇城新聞)』·『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제국신문(帝國新聞)』 등을 비롯한 민족언론기관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서상돈이 앞장선 대구 지방의 국채보상운동은 전개 방법이나 열성 면에서 단연 돋보였다. 나라를 살리자는 일에 공감한 이 운동은 나라와 국적마저 뛰어넘는 바람을 일으켰다.


국채보상운동에는 양반·부유층은 물론 노동자·농민·부녀자로부터 상인·군인·학생·기생·승려 등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은 계층이 없을 정도였다. 유아나 초등학교 학생들도 용돈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특히 여성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반찬값을 절약하거나 비녀·가락지·은장도 등을 의연품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일본 유학생들과 멀리 미주 사회에 있던 교포들도 의연금을 보내왔다.

 

▲ 1918년 10월 13일 축복 당시의 대구 성모당

 

▲ 2013년 4월 19일의 대구 성모당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참여하는 등 열기를 고조시켰다. 어느 서양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라고 감탄하면서 4원을 내놓았고, 평남 영유군 이화학교(李花學校)의 일본인 교사 정유호빈(正柳好彬)도 2원을 기탁하는 등 외국인의 동참도 꾸준히 늘어났다.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와 친일 세력의 거센 반발과 방해공작이 있었지만 이 운동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로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그때 모인 자금은 그 뒤 전개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쓰였다. 국채보상운동은 비록 미완성으로 막을 내렸지만, 우리 민족의 힘과 의지를 만천하에 과시한 민중의 교향곡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으로 다시 살아나 세계인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평상시 서상돈은 기회가 닿는 대로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과 성모님의 것이다. 내가 모은 재산을 성당에 바치려 한다. 세 분 조상들의 순교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서상돈은 자신이 바치는 재산은 세 분 순교자 대신 바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마사비엘 동굴과 주교당 건립 작업이 시작됐다. 건립에 10년 세월을 작정한 서상돈은 매일같이 공사장을 찾았다. 3년이 지날 무렵 건강이 악화됐다. 그는 아들 병조를 불러놓고 유언을 남겼다.


“남산고개 성모당을 꼭 이룩해야 한다. 내 뜻이 아니라 성모님의 뜻이다. 내 재산도 성모님의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염원하던 성모의 루르드동굴이 화원 언덕에 건립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13년에 선종,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필리 1,21-23)


이처럼 서상돈은, 사람은 믿음만으로가 아니라 믿음을 실천함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야고 2,17)을 그대로 실천하여 믿음이 척박한 이 땅에 새로운 성전(聖傳)을 세웠다. 그가 이 땅에 세운 거룩한 전통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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