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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년 여름 / 계간 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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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야기] 사제서품과 성지순례 후 귀국
첨부 작성일 2018-07-22 조회 1182

우르바노(Urbano) 신학교 생활 체험기 (5)
사제서품과 성지순례 후 귀국
박정일 미카엘 / 원로사목자, 전 마산교구장 주교

 

필자 박정일 주교

 

나는 우르바노 신학교 생활이 처음에는 많이 힘들고 어려웠다. 당시 로마에서는 모든 강의와 시험 등이 라틴어로 이루어졌는데, 나는 한국에서 소신학교를 다니지 못하여 라틴어를 배우지 못한 채 로마에 갔기 때문이었다. 첫 1년 동안은 매우 어려웠지만, 1년이 지난 후에는 큰 어려움 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 또는 다른 나라 학생들이 라틴어를 잘 배우고 와서 어려움 없이 공부하는 모습은 몹시 부러웠다.

 

철학과 2학년 때였다고 기억되는데, 내가 사제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에 가는 것을 반대하셨던 부모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모님 반대가 심해서 숨어 다니던 일, 그러던 중 내가 잠깐 소화불량으로 고생을 할 때 어머니께서 ‘신학교 못 가게 하니 병이 났구나.’ 하시며 ‘가려면 가라.’ 하시길래 기쁜 마음으로 덕원 신학교에 입학(1948년 9월)하였던 일 등이 주마등처럼 내 머리를 스쳐갔다.


철학과 3년과 신학과 4년을 마치고 사제서품을 받을 날이 다가왔다. 사제서품은 12월 20일로 예정되었는데, 그때 마침 우리 반을 서품하시기로 하였던 아가지아니안 추기경(당시의 인류복음화성 장관)께서 한국을 방문하실 계획이 있어서 한 달 앞당겨 11월 23일에 서품을 주시게 되었다. 우리는 예정보다 한 달 일찍 사제가 된다고 모두 기뻐하였다.


나는 사제서품 기념 상본에 넣을 성경 구절을 무엇으로 할까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나 주의 자비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리이다”(성영 88,2. 지금의 새 번역은 “저는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시편 89,2)) 로 정하였다. 죄 많고 부족한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사제로 불러주신 데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6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사제로, 주교로 행복하게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하느님의 자애(사랑)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라는 지금의 시편 번역이 오늘의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 신학과 3학년 시절                          ▲ 사제서품 장면

 

 

▲ 사제서품 상본                                          ▲ 사제서품 당시의 필자

 

 

1959년 6월 우르바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학교를 떠나게 될 무렵, 나에게 생각지 않았던 뜻밖의 좋은 학업의 기회가 주어졌다. 로마에서 사회학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로마의 가톨릭대학들에 사회학과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그레고리안 대학에 사회학과가 생겨 전교지방의 젊은 사제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는데, 그 장학금을 내가 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평양교구장 서리었던 안 주교(몬시뇰 캐롤 Mons Carroll)께서 이를 기꺼이 허락하시어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학문인 사회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순조롭게 사회학 석사학위를 마치고 62학년도에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962년 4월 주교님으로부터 귀국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 명을 받고 처음에는 좀 당황스럽고, 논문을 마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였다.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귀국 준비를 서둘렀다. 논문을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잘 되었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더구나 주교님께서 부르시니…. 기쁜 마음으로 귀국 준비를 하였다. 로마에 갔던 해가 1952년이니 만 10년 만의 귀국이었다. 감개무량하였다.


귀국을 앞두고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한국에 들어가면 다시는 외국여행을 할 수 없을 터이니(당시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성지(이스라엘)를 꼭 다녀가고 싶었다. 아울러 도중의 여러 나라들을 방문할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지순례는 로마에서 출발하는 순례단에 가입하여 동행하였다. 감동적이었다. 많은 사진을 찍었다. 이 먼 곳까지 성지순례를 못하는 신자들에세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700~800장의 환등용 사진을 찍었다. 귀국 후 신자들에게 환등으로 보여주었는데 얼마나 좋아하던지…. 오늘날에야 별것 아니지만! 그 디아포시티부(환등용 사진)가 지금은 나의 서고 안에서 잠자고 있다.


성지순례를 마친 다음부터는 나 혼자서 무전여행을 하였다. 한국까지의 비행기 표는 이미 교구로부터 받았으니 여러 나라 여러 도시에 기착하여 구경도 하고 동창들(우르바노 신학교 생활 체험기 2, 3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여러 나라에 동창 및 선후배가 있었다.)을 방문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로마를 떠나기 전에 긴 여행을 계획하고 여러 나라의 비자를 받고, 동창들에게 도착과 출발 일시를 통지하는 편지를 쓰는 데도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제일 처음으로 기착한 데가 이라크의 바그다드였다. 다음에 인도의 뭄바이, 태국의 방콕, 월남의 사이공, 홍콩, 대만의 타이페이, 그리고 일본을 거쳐 9월 7일 오후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7월 초에 로마를 출발하였으니 장장 2개월간의 무전여행이었다, 혼자서 무거운 가방을 들고…. 돌이켜 생각하니 무모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무사고였으니 기적 아닌 기적이었다. 어여삐 봐주시고 보호해주신 하느님과 나를 따뜻이 맞이해준 동창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귀국 1주일 후, 나는 평양교구의 다른 두 신부(프랑스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유재국 바실리오 신부와 서울 신학교 출신인 장덕범 바오로 신부)와 함께 사제가 가장 많이 모자라는 부산교구 본당의 보좌신부로 임명되었다. 평양교구 소속 신부들은 북한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지만) 남한의 어떤 교구에 배속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초량 본당 보좌로, 유 신부는 서면 본당 보좌로, 장 신부는 주교좌 본당 보좌로….


임명을 받고 부임한 것이 9월 2일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때만 해도 부산교구에 사제가 모자라서 주교좌 성당 같은 큰 본당에도 보좌신부가 없었다. 명예롭게(!) 우리는 부산교구의 역사상 첫 보좌 신부들이 되었던 것이다. 다음해인 1963년 봄, 우리 셋은 본당신부로 임명을 받았다. 나는 진양군 문산 본당신부로, 유 신부는 마산 월남 본당신부로, 장 신부는 합천 본당신부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해인 1964년 부산교구가 부산교구와 마산교구로 분할되어 경상남도 서부지역이 마산교구로 독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산 본당 신부로 있던 나는 마산교구 사제가 되었던 것이다.


문산 본당에서 사목생활은 시작한 나는 문산 본당에서 4년, 진주 옥봉 본당에서 4년을 지내고 1970년 8월 광주가톨릭대학 교수로 임명받았다. 신학교 교수로 임명을 받았을 때 몹시 두렵고 당황스러웠다. 박사학위도 없는 나에게 대학교 교수라니…. 석사학위가 있어도 신학교 교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순순히 주교님의 명을 따라 신학교에 부임한 것이 1970년 9월이었다. 처음에 나에게 주어진 과목이 사회학이었고, 그 후 4년 동안 윤리신학을 강의하였다. 신학대학에서 5년 동안 재직하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기간이 여러모로 어렵고 힘들기도 하였지만, 여러 기회를 통한 학생들과의 접촉, 유능한 교수들과의 대화 등을 통해 나의 사제생활에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은혜로운 시기였다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상한다.


그런데 1977년 3월 어느 날, 제주교구장 임명이라는 청천병력 같은 통고를 받았다. 광주가톨릭대학 교수로 임명받았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당황스럽고 뜻밖의 일이었다. 그때의 놀라움과 느낌 등을 표현할 적절한 어휘를 찾기가 어렵다. 주교 서품일은 5월 31일로 잡았다. 김수환 추기경님과 최재선 주문장교님(부산교구 초대 주교님)께서 서품되신 날과 같은 ‘복된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이었다. 서품 일을 앞두고 기념 상본에 어떤 성경 문구를 넣을까 고민하였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다른 주교님들의 것도 참고하여 ‘충성과 온유’로 결정하였다. 집회서 45장 4절의 “주님께서 모세의 충실함과 온유함을 보시고 그를 선택하셨다.”는 말씀의 요약이었다.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충성, 그리고 모든 덕의 기초가 되는 겸손(겸손한 사람은 온유하다.)을 모토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주교 서품식은 제주 주교좌 성당(중앙 성당)에서 신자 약 300명이 모인 가운데 조촐하게 거행되었다. 주례주교는 당시 주한 교황대사이셨던 도세나(Luigi Dossena) 대주교님이셨고, 서품주교는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님(현 광주대교구 원로사목 주교)과 장병화 요셉 주교님(마산교구 제2대 주교, 1991년 선종)이셨다.(주교서품은 한 분의 주례주교와 두 분의 서품주교가 하게 되어 있다).

 

제주는 본래 광주대교구에 속하는 한 지역이었는데, 내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정식교구로 승격되었다. 당시 제주 주민이 약 50만 명이었는데, 신자수 약 5만 명에 사제수 불과 13명(한국인 사제 7명, 골롬반회 선교사제 6명)이었으니 젊은 초임 주교가 일을 익히기에 알맞은 작은 교구였다. 더구나 오늘과는 달리 복잡한 사회 문제도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 그런데 1982년 6월, 5년 동안 행복하게 지내고 있던 나에게 전주교구장 전보발령이 내렸다. 전주교구는 제주교구에 비해 큰 교구일 뿐 아니라 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구였다. 또 한번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전주교구장으로 7년째 되던 1989년 2월, 나에게 또다시 마산교구장 전보명령이 내렸다. 교황님께서 두 번이나 나를 전보시키신 데는 아마 주교의 소임을 제대로 수행 못 하는 것을 아시고 다시 한 번 잘 해 보라는 뜻이었으리라! 이렇게 나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아마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세 교구를 거친 불명예스러운(?) 주교가 되었다.


2018년은 사제서품 60주년, 주교서품이 41주년 되는 해이다. 그러니까 오늘까지 사제로서 20년, 현역 주교로서 25년, 은퇴 주교로서 15년을 살아온 셈이다. 반세기가 넘는 기나긴 세월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각별한 은총 때문이었다. 어떻게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할지, 더구나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어떻게 더 잘 살아가야 할지가 나의 크나큰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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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교구장 문장      ▲ 전주교구장 문장          ▲ 마산교구장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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