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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평신도
  • 2018년 가을 / 계간 61호
    하느님을 향한 시선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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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집]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첨부 작성일 2018-11-28 조회 652

한국평협 설립 50주년 맞이
 ‘한국. 평신도. 열두 마당’

정리 
서상덕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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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다. 교회의 일원이자 대다수 를 이루고 있는 이들은 평신도다. 평신도들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은 세상이다. 여기서 평신도들의 소명이 비롯된다. 교회의 본 질적 사명인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다. 이 선포는 단순한 말이 아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고 한 말씀과 이어진다. 이 말씀 을 통해 ‘모든 것’(요한 1,3)이 생겨났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하느님 창조 역사에 함께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창조사업으로 부름 받은 것이다. 이렇듯 세상 끝 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어 질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평신도들이 행하는 온갖 형태의 활 동을 평신도사도직이라고 한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 들은 특히 “복음 선포와 인간 성화에 힘쓰며,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켜 현세 질서를 완성하는 활동을 통하여 세상에 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인간 구원에 이바지함으로써”(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평신도사도직 교령> 2항) 사도직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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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사도직은 세상을 시작과 끝으로 한다.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복음의 씨앗은 세상 속에서 발아하고 꽃을 피우고 열매 를 맺는다. 그래서 평신도, 그리고 평신도사도직은 집 안에만, 교회 안에만 머무를 수 없다. 아니,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 평 신도들의 사도직분이다.

“발전된 민주국가를 세워주기 바란다.” 5·16 군사쿠데타로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 장 면(요한, 1899-1966년)이 자신의 사퇴 성명에서 몇 번 이고 강조한 말이다. 그가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부서진 안경태를 추스르며 삼엄하게 둘러싼 군인들과 함께 뒷문으로 사라지는 장면 총리의 모습은 한국, 또 한국교회가 걸어간 질곡의 길을 그대로 상징한다. 장면의 퇴장은 한국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복음화 여정에 있어 크나큰 훼절이 자 손실이었다. ‘부패’, ‘무능’으로 덧씌워진 장면 의 좌절은 한국교회, 그리고 이 땅 신앙인들의 좌 절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한국 근현대 역사가 가질 수 있었던 최고의 민주주의자, 민주투사였 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만큼 그에게는 많은 거짓이 덧씌워져 있다. 5·16 군사쿠데타를 막지 못한 책임이 대표적이다. 

“무수한 시민들이 피를 흘리게 할 수야 없지….” 
장면은 자신의 정치적 좌절보다 무고한 사람 들의 희생을 먼저 떠올렸던 것이다. 그토록 믿었 던 미국마저 등 돌리고 몰라라 하는 마당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무엇이었을까. 쿠데 타 후 서슬 퍼런 군부세력이 장면 총리가 이끌던 제2공화국 각료들의 집을 뒤져 부정부패의 꼬투 리를 잡으려 했지만, 나온 것은 한 장관 집에서 찾아낸 아이스박스 한 개가 다였다. 
장면은 총리가 된 후 모든 공무원들에게 점심 때 외식하러 나가지 말 것을 주문했다. 자신도 도 시락을 싸 와 집무실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이 때 문에 야당과 각종 언론에서조차 민주당 내각을 ‘도시락 내각’이라고 비꼴 정도였다. 한마디로 부 패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권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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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 장면 
장면은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 적선동 외가에서 장기빈(레오)과 황 루치아의 3남 4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1899년 9월 12일 서울 종현(현 명동) 본당에서 주임 빅토르 신부에게 유아세례 를 받았다. 그는 국무총리가 되고 나서도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정도로 기도와 순종, 인내가 몸에 밴 인물로 성장한다. 

이후 아버지의 근무지인 인천 전동으로 이사 해 1906년 8월 4일 인천 성당 부설 박문학교(현재 박문초등학교)에 입학, 한학과 수학 등을 공부했 다. 박문학교 보통과(1910년)와 고등과(1912년)를 졸업한 그는 학창시절 내내 공부와 신앙 활동에 만 전념했다. 15살 되던 해 뒷날 서울대학교 농과 대학의 전신인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했다. 1917년 3월 농림학교를 졸업한 장면은 편하게 살 수 있 는 관리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미국 유학을 결심 한다. 그해 9월 경성 중앙기독교청년학관(현 서울 YMCA) 영어학과에 진학했다. 청년학관 졸업반 재학 중인 1919년 3월 1일 3·1 만세 운동에 참여 할 정도로 열혈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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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 청년학관(YMCA)을 졸업한 그는 한 국에 진출해 있던 메리놀 외방선교회의 후원으로 그해 10월 한국 천주교 청년회 대표자격으로 동 생 장발과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21년 9월 미국 뉴욕의 맨해튼 가톨릭대학교 영문학과에 진 학해 부전공으로 교육학을 공부했다. 1925년 6월 맨해튼 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조국 복음화 에 뜻을 두고 귀국을 결심한다. 그해 6월 30일 이탈리아에 도착, 7월 5일 로마 바티칸에서 열린 ‘한 국인 79위 순교자’ 시복식에 한국인 신자 대표로 참석하고, 7월 6일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11세를 알현한 후 8월 29일 귀국했다. 귀국 후 그의 평신도사도직 활동이 본격화된 다. 평안남도에 있던 메리놀센터 하우스의 어학 교수가 그에게 주어진 첫 십자가였다. 1927년부 터는 메리놀신학원의 당시 은사였던 패트릭 번 신부가 있던 평양 성당에 근무하며 평양교구 사 목을 도왔다. 1931년 서울 동성상업고등학교 교사 로 초빙돼 1936년에 교장이 되어 해방 때까지 근 무했다. 그는 당시 서울교구장이던 원 라리보 주 교의 사목을 적극적으로 돕기도 했다. 서울교구 에서 원 라리보 주교와 주간 윤형중(尹亨重) 신부 를 중심으로 잡지 『가톨릭 청년보』를 발간하자 장 발(張勃)·이동구(李東九)·정지용(鄭芝溶) 등과 함 께 편찬위원으로 활약했다. 1939년 4월부터 경성 계성국민학교 교장을 겸 임하였고, 1939년 9월 천주교 청년회연합회 회 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조국의 신자들을 깨우치 기 위해 영·한 천주교회 용어 사전인 『The Summary of Religious Terms』를 비롯해 『교부들의 신 앙』 등의 번역과 『구도자의 길』, 『조선천주공교회 약사』 등의 출간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이처럼 장 면은 평신도사도직 실현에 일찍부터 다방면에서 선구자 역할을 했다. 

투철한 수덕생활 
장면은 세속적 지위가 어떻게 바뀌든 참 그리 스도인으로서 변함없는 모습을 보였다. 재속 프 란치스코회 입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면면 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미국 유학 중이던 1921년, 장면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재 속 프란치스코 국제형제회(성프란치스코회 제3회) 회원이 됐다. 이후 동생 장발을 비롯해 가족과 지 인들을 차례로 입회시키고, 귀국 후에는 재속회서울형제회 발족에 나섰다. 서울형제회 초대 회 장에 이어 1961년에는 재속회 한국연합회 초대 회 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장면의 삶은 무엇보다 순 교자적 영성과 수도자적 복음 삼덕의 실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수도 삼덕 중 ‘청빈의 덕’은 정치인이 된 후에도 부정부패를 근절해 나 가는 데 밑거름이 됐다. 삶의 단 한순간에도 ‘정결 의 덕’을 어기지 않고 살며 자녀들에게도 그러한 행동을 굳건히 가르쳤다. 또한 ‘순명의 덕’으로 교 회 일에 헌신하는 생을 보냈다. 

소명에 충실한 참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장면의 면모는 세상 한가운 데서 교육자로, 외교관으로, 또 정치인으로 유감 없이 드러났다. 장면의 온 생애를 통해 가장 큰 화 두는 조국의 복음화를 통한 독립정신 고취와 자유 민주주의 확립이었다. 장면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 며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독 립운동에 참여한 신학생들을 퇴교 조치하는 암울 한 시대 상황에 맞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서의 사명을 일깨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독립투사들의 진정한 지도자는 오직 한 분이 계신다. 천주님이야. 맨주먹으로는 왜놈들의 총 칼을 당해내지 못하지만, 신앙심과 천주님 앞에 서는 무기란 무력한 것이지. 모든 동포가 천주님 을 믿도록 우리가 노력해야겠는데….” 장면은 민족의 복음화가 독립에 기여하는 길 임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의 미국 유학도 결국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앎을 넓히고자 하는 모색 의 결과였다. 미국 유학생활을 통해 장면은 자유 와 민주주의를 배우고 맛보았으며, 언행을 종교 적 양심에 비추어보고 행동하는 습성을 길렀다. 

해방은 교육과 종교 운동을 통해 민족의 미래 에 투자해온 그의 역량을 외교와 정치로 돌리는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당시 장면은 민족의 최대 당면 과제를 자주·자립과 문화·교육 정책의 강 화로 판단했다. 해방이라는 복음화의 여정에 분 수령을 맞은 한국교회는 복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길에 장면을 내세웠다. 장면은 교회의 권고에 따라 1946년 2월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 의원 의원으로, 같은 해 12월에는 입법의원 의원 으로 활동한다. 

“가톨릭교도는 그 국민의 번영을 위해 저마다 그 책임을 져야 한다. … 가족 또는 그가 접하는 집단과 단체를 그리스도교화함으로써 … 이 감화 는 더 넓게 그 나라의 온 사회적 및 정치 생활에 까지 미칠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제 헌국회 의원이 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정치 이념 과 제도의 보편화 작업에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 디뎠다. 제1·2공화국 시기에는 국무총리와 부통 령 등을 역임하며 부정부패 청산과 반독재 투쟁 에 나섰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교회는 민주주 의 정신의 보편화와 민주세력의 보루라는 평가를 얻게 된다.

“종교 및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민의 정 치적, 사회적, 경제적 생활의 민주적 발달을 도울 수 있는 … 그리스도교 원리를 따라 깊은 지혜와 굽힐 줄 모르는 결심으로 장애와 싸워야 한다. 정 당에서 지도하는 자리를 차지하는 그리스도교도 도 정당의 정책에 그리스도교 원리를 침투시키고 정부에게 그 실시를 촉구함으로써 나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국가·신앙 재건을 위한 외교 노력 
장면은 외교에 있어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 했다. 이는 그의 굳건한 신앙이 바탕이 됐음은 주 지의 사실이다. “세계는 나날이 좁아져 가고 모든 종족과 모든 국민 사이의 접촉은 더욱 친밀하게 되어간다.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일치와 참된 평등을 구하는 소망은 당연한 것이며 정당한 것이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형제라는 이 교회의 가르침은 피부의 색깔, 인종, 사회적 지위 의 구별 없이 인격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평등한 존엄을 각자에게 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교도가 아닌 우리 형제, 특히 지식인에게 교회의 이 가르침을 열심히 또 절실하게 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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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12일 열린 제3차 유엔 총회가 대한 민국을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도 록 한 데에는 장면을 수석대표로 한 한국 유엔 대 표단의 활약이 컸음은 잘 알려져 있다. 1949년 당 시 한국의 재외 공관은 장면이 대사로 있던 주미 대사관뿐이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승인 외교는 전 적으로 미국 워싱턴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장면은 중추적 역할을 했다.

6·25전쟁은 장면의 존재가치를 다시 한 번 드 러나게 했다. 전쟁이 터지고 남한의 존립이 풍전 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는 또다시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유엔 안보리에서 연설을 통해 한 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군사적 원조를 호소했다. 6월 27일 안보리 결의를 이끌어낸 것은 그가 아니 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함께 그는 트루먼 대 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6월 30일 저녁에 미국이 한 국전 참전을 발표하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군 제24사단을 한반도에 투입하게 하는 결정을 내리게 함으로써 한국을 지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장면의 또 하나의 공헌은 전쟁으로 파괴된 한 국 재건의 기초를 확립한 것이다. 주미대사로 있 던 장면은 동분서주 노력해 유엔 총회가 1950년 10월 7일자 결의로 유엔 한국위원단을 개편해 7개 국(호주, 칠레, 네덜란드, 파키스탄, 필리핀, 태국, 터 키)으로 구성된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을 신설하도록 해 전후 복구사업에 착수할 수 있게 했다. 장면은 이렇게 외교가의 변방이었던 한국 문제 를 한반도의 틀을 넘어 세계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한국을 국제 사회 속에 새롭게 자리매김 하게 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 속에서 국가와 인종, 종교를 초월한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참 그리스도인, 참 평신도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신앙선조들이 그랬듯 2018년 한국 사회를 살 아가고 있는 평신도들에게도 하느님께서 주신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있다. 누구에게도 예외 없 이…. 이 씨앗은 세상 속에서 발아하고 생장해 나 간다. 복음의 씨앗이 본격적으로 뿌려진 조선시대부터 근현대 역사를 거치며 신앙 선조들이 몸 소 보여주고 살아간 믿음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 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목소리를 전해주고 있 을까. 그것은 태초부터 있었던 그 ‘말씀’을 화석화 하거나 박제화하지 말라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 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 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 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 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 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 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 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 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 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교회는 그 시작부터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 은 믿음’(마태 12,46-50)임을 가르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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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작부터 ‘순교’라 는 가장 고귀한 실천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믿음 의 씨앗을 뿌려왔다. 주님께서 심어 놓으신 ‘복음 의 씨앗’을…. 피를 흘리는 적색순교든, 그렇지 않 은 백색순교든…, 죽음조차 마다하지 않고 신앙 선조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 씀’이었다. 말씀 그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에 그 무 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이 땅에서 열매 맺어 온 신앙의 역사는 말씀을 가리고 숨기려는 행위와 맞서 순교라는 실천으로 드러났다. 순교영성을 모태로 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 들은 누구보다 ‘말씀’과 그 말씀의 ‘실천’을 자랑 으로 여긴다. 한국 평신도들의 정신과 활동이 새 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 1965년) 정신과 가르침에 따라 1968년 7월 현재의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이하 한국 평협)의 전신인 한국가톨릭 평신도사도직 중앙협의회(The Korean Catholic Central Council for the Lay Apostolate)가 창립되면서였다. 평신도사도직의 활 성화를 위해 발족한 한국평협은 이후 한국 사회에 안에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첨병 역할을 해왔다. 그 첫걸음은 1970년 9월 6일 한국교회 주교단의 모자보건법안 반대 성명에 대한 지지로 드러났다. 이후 1976년 3월 구속 사제와 고통 받는 형제를 위 한 ‘사순절 평신도 기도 운동’, 1976년 12월 13일 명 동 3·1절 기도회 사건 관련 ‘평신도 여러분에게 고 함’ 성명 발표, 1978년 10월 22일 ‘추곡수매가 인상 건의’, 1979년 8월 16일 ‘안동 오원춘 사건에 대한 대정부 건의문’ 채택, 1982년 12월 3~4일 ‘제1회 여 성문제 심포지엄’ 개최 등 세상 속에서 진리의 빛 이 사그라질 때마다 당당히 목소리를 높였다. 이와 같은 발걸음을 밑거름 삼아 1983년에는 대사회운동으로 신뢰회복운동을 펼치기 시작했 다. 이 신뢰회복운동은 1989년부터 ‘내 탓이오 운 동’으로 이어졌고, 이후 ‘우리상품 쓰기와 우리농 산물살리기 운동’, ‘평신도 제자리 찾기 운동’ 등으 로 전개됐다. 2001년에는 도덕성 회복을 위한 ‘똑 바로 운동’으로 새롭게 신뢰회복의 불을 지폈으 며, 2004년부터는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세상’ 구현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특히 2015년부터는 사회 전반의 의식개혁을 돕는 ‘답게살겠습니다’ 실천운동을 교회 안팎에 제안해 그리스도의 정신 과 가치를 사회 전체로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

세계 교회는 교회 역사에서 유례없이 평신도 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이 땅 에 가톨릭 신앙의 싹을 틔우고 키워가고 있는 한 국교회에 갈수록 큰 기대와 희망을 걸고 있다. 그 배경에는 순교영성을 밑거름으로 하는 한국교회 평신도들이 있다. 평신도사도직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통해 더욱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복음 화의 길을 걸어 나갈 때, 평신도는 이 땅의 새로 운 복음화의 주역으로 거듭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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