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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평신도
  • 2018년 가을 / 계간 61호
    하느님을 향한 시선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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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야기] 사도 요한
첨부 작성일 2018-12-19 조회 708

주보성인과 나

사도 요한
송재리 사도 요한 / 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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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5년 12월 도봉구 방학동 성당에서 사 도 요한으로 세례를 받았다. 41세의 늦깎이 신자 였다. 아내와 두 아이는 이미 가톨릭 신자였다. 가 족 중 막내로 신자가 된 것이다. 아내와의 결혼이 나를 가톨릭 신자로 이끌었다. 내 본가 쪽은 거의 개신교 집안이다. 나도 개신교 계통의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기독교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교회 에는 나가지 않았다.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시 기 가톨릭교회의 역할에 감명을 받은 나는 가톨릭 교회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종교를 갖게 된다면 가톨릭으로 선택할 생각이었다. 집안 식구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1986년 결혼했다. 아내는 천주교신자였고 결혼을 하려면 성 당에서 정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래서 아내가 다니는 군산의 성당에서 신부님 면담을 하고 혼 인성사를 받았다. 면담 설문지 항목에 있는, ‘앞으 로 성당에 다니겠다.’는 약속 부분에 대하여 신부 님께서 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셔서 부담을 느 끼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신부님은 얼마 전에 사제수품 50주년을 맞으신 전주교구의 박진 량 라우렌시오 신부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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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서울과 군산을 오가며 만나던 시절이 있었다. 아내는 서울에 오면 외삼촌댁에 머물곤 했다. 어느 날 외삼촌댁에서 저녁식사를 하던 중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제가 머지않아 성당에 꼭 다니겠습니 다.” 하고 호언하였다. 그러나 결혼 후 성당에 가겠다는 약속은 한동안 지켜 지지 않았다. 아내는 혼자 열심히 성당 에 다녔다. 집에서 성당까지 대중교통 이 불편했던 광명시에 살 때, 아내를 성당에 태워다 주고 미사가 끝날 즈음 에 두 아이와 마중 나가 아내를 데리고 오곤 했던 기억이 난다. 방학동으로 이 사 와서 아이들도 성당에 다니기 시작 하였다. 나는 그때도 아이들을 주일학 교에 보내고 데려오는 일로 성당 앞까지만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결혼 후 한 번도 성당에 가자고 하지 않던 아 내가 1995년 초에 예비신자 교육을 권하여 교육 을 받았다. 교육은 유익하고 재미있었다. 교육기 간에 난 성경을 열심히 읽었고, 교육시간에 빠지 지 않고 출석했던 기억이 난다. 세례받기 전 신부 님 면담이 있었는데, 차가운 겨울밤에 당시 가건 물이던 성당 밖에서 한참을 추위 속에서 기다렸 다. 근처 연립주택에 기거하시던 신부님이 왠지 나오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터덜터덜 걸어 집 에 돌아오며 이것도 하느님의 뜻인가 보다 하며 비약했던 일이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 천주교 신 자가 되는 것이 서구문화를 받아들여 나에게 있 는 우리 고유의 토종 정신문화를 잃는 게 아닌지 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신 자생활을 하면서 천주교가 우리 전통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교육시간에 신부님이 지병인 허리디스크 가 도져서 나오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며 다시 면담 약속을 잡았다. 면담에서 신부님께서 “가족이 모 두 신자네요.” 하시며 교육기간 중 하느님의 존재 에 대한 신비한 느낌을 받은 게 있는지,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는지를 질문하셨다. 그런 특별한 경험 이 없었던 나는 성경, 특히 구약의 역사서 부분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씀드렸다. 신부님께서는 신 비한 경험의 예를 한두 건 드시며 앞으로 체험하 게 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세례명은 박진량 신부님께 부탁드렸다. 박 신부님은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던 사도 요한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라.”며 그렇게 정해주셨다. 세례 후 나의 신자생활은 본당 미사참례와 소 공동체모임이 중심이었다. 주일미사는 꼭 참석하 려고 노력하였다. 휴가 중이나 아이들 방학 중 지 방에 여행을 가서도 꼭 그 지역의 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드렸다. 양양 성당에서 미사 후 어깨를 툭 치며 “언제 이사 왔어?” 하고 친근하게 말을 걸었던 나이 지긋한 교우가 생각난다. 교우란 것만으 로 그렇게 살갑게 대해 주던 그가 정겨웠다. 그때 여행 중 주일에 그 지방의 성당에서 편하게 미사 드릴 수 있는 천주교가 매우 좋았다. 소공동체모 임에서 처음에는 어색했으나 선배 교우들의 배려 로 곧 적응할 수 있었다. 영세 후에 바로 독서봉사를 시작하여 지금까 지 이어지고 있다. 처음 독서 때에 무척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독서봉사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 끔 긴장될 때가 있다. 그 후 세대주 모임 구역장 과 사목회의 임원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니 마음속에 돈독한 신앙을 키우기보다 외적인 활동에 더 치우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로 살아오면서 나의 주 보성인이 어떤 분인지, 그분의 어떤 점을 본받을 지를 깊게 고민하지 못했다. 이 글을 준비하며 ‘주보성인과 나’라는 주제를 성찰하기 위해 사도 요한은 어떤 분인가를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고 되새긴다. 

“요한 사도는 열두 사도 중에 가장 어렸고 가 장 오래 사셨으며,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로 표현됩니다. 형님이신 야고보 사도와 함께 그 물을 손질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중요한 행적 에 늘 함께하셨으며, 예수님이 수난 당하실 때 십 자가 형장에 따라가 예수님의 임종을 지킨 유일 한 제자입니다. 특히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이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시며 요한 사도 에게 성모님을 맡기셨는데, 이를 통해 자녀들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빈 무덤으로 달려갔고, 부활하신 예수 님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 사도에게 알리 셨습니다. 성령 강림 후에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예루살 ▲ ‌ ‌ 혼인성사 렘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초대 교회의 건설과 복음 선포에 힘썼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요한 사도를 베드로, 야고보 사도와 함께 ‘교회의 기둥’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성인께서는 에페소에 서 활동하셨고, 로마 황제의 박해를 받아 섬으로 귀양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묵시록을 저술하고, 황제가 사망하자 에페소로 돌아와 요한복음과 요 한서간을 저술했다고 전해집니다. 형님이신 야고 보 사도는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신 반 면, 요한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유일하게 순교 하지 않고 선종했다고 전해집니다.”(<가톨릭굿뉴 스> ‘성인자료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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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의 삶을 살펴보며 인상적인 점이 두 가지 있다. 먼저 사도께서는 믿음이 깊고 부지런 한 분이셨던 것 같다. 예수님의 중요한 행적에 늘 같이하셨고, 부활 때에도 가장 먼저 무덤에 가셨 으며, 복음과 서간 및 묵시록을 저술한 사실은 성 인의 부지런함을 증명한다. 두 번째는 침착함과 온유함이다. 사도 중 가장 젊었던 분인데 순교하 지 않고 선종하신 면을 보면, 웬만한 일에 흥분하지 않고 사람과 만날 때나 어떤 일을 처리할 때 부드러움으로 임하신 듯하다. 나는 세례 이후 주보성인을 염두에 두고 신앙생 활을 하지 못했다. 평소 게을렀던 나의 삶을 반성 하고 이제부터 요한 사도의 신심과 부지런함, 그리 고 온유와 침착성을 본받고 싶다. 앞으로 요한 사 도의 삶을 따를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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