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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평신도
  • 2018년 겨울 / 계간 62호
    희년의 정신으로 새롭게 출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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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집] 평신도 희년 자선 공연 [빛으로 나아가다] 를 보고
첨부 작성일 2019-01-08 조회 617

평협 50주년 폐막식 참관기 

평신도 희년 자선 공연 〈빛으로 나아가다〉를 보고 

이재철 베네딕토 / 고려대학교 가톨릭교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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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가을날이다. 다소 싸늘한 기운을 느끼며 명동으로 향한다. 서울평협 창 립 5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평신도 희년 자선공연 〈빛으로 나아가다〉를 관람하기 위한 발걸음이다. 나는 11월 6일에 있는 세 차례 공연 중 오후 2시 첫 회를 택했다. 명동대성당 문화관 2층의 꼬스트홀에는 전철로 이동하느라 일찍 도착하리라는 예 상과 달리 10분 전에 입장하였다. 현관문 앞에는 평협의 손병선 회장님과 임원 십 여 명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어 질서정연하였다. 공연장 안은 이미 만석이었다. 평 신도 희년 자선공연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공연장 입구에는 자선 모금함이 놓여 있었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모금함 이 썰렁하게 보였다. ‘자선공연은 무료공연이 아니라 말 그대로 기부공연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인식이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관람하고 나올 때는 이와 다르리라는 기대로 아쉬움을 달랬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넓고 쾌적한 공연 장소가 교우들에게 보다 많이 알려지 고, 저렴하고 수준 높은 공연이 자주 열린다면 많은 사람들이 더 자주 이곳에 찾아 와 즐기며 주님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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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후 조명이 꺼지며 무대가 밝게 빛났다. 1부는 <힐링 콘서트>다. 듀오 메타 노이아의 생활성가 가수 김정식 로제리오와 테너 송봉섭 요한, 그리고 소프라노 박 보미 가타리나가 몇 곡의 노래로써 좌중을 휘어잡았다. 가을날에 어울리는 노래들 이 마음을 차분하게 하였다. 가수 겸 진행자인 김정식 씨의 능숙한 진행 멘트가 관 객의 박수를 유도하였다. 노래도 좋았지만, “인간의 목소리는 ‘신이 주신 목소리’라 고 하는데, 우리는 그 목소리로 ‘신을 향한 목소리’가 되어 주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 합니다. 무조건 따지지 말고 박수쳐 달라.”는 멘트가 마음을 움직였다. 소프라노 박 보미 씨의 ‘Nella Fantasia’는 자주 듣던 음악이었지만, 더욱 구슬프게 마음을 울렸다.

15분간의 브레이크타임이 있었다. 그제야 밖으로 나온 관객들이 모금함 근처에 몰렸다. 입장할 때는 바쁜 마음에 스쳐 지나갔던 모금함이 새롭게 눈에 띄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내심 기쁜 마음으로 다시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무대 위에는 그새 연극 무대가 설치되었다. 서울가톨릭연극협회장 최주봉 씨가 무대에 올라 연극을 소개하며 분위기를 잡았다. 2부 연극 <빛으로 나아가다>는 김 문태 힐라리오 교수님의 원작을 서울가톨릭연극협회 작품개발팀이 각색한 작품으 로 민복기 안드레아 씨가 연출하였다. 모범적인 평신도의 삶을 그린 《불꽃이 향기 가 되어》(으뜸사랑, 2016)에 실린 ‘가진 바를 나눈 참 교육자 : 김익진 프란치스코’를 연극으로 만든 것이었다.

전남 목포 만석군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김익진(1906-1970년)은 프란치스코 성인 과 같이 주님의 뜻대로 청빈과 순종으로 한평생을 살았던 분이다. 연극은 노년의 김익진이 수녀인 딸과 함께 내내 무대 뒤편에 앉아 중간 중간 연기하였고, 시대 순 으로 일어난 사건을 다른 배우들이 등장하여 연기하였다. 어린 김익진, 청년 김익 진, 성인 김익진 등이 차례로 등장해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방식이었다.

 김익진은 일제 때 일본 유학에 이어 중국 유학을 한 인재였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청년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인생행로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형 김우진이 현해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은 그를 더욱 방황하게 만들었다. 북경대 에서 공부하던 그는 1927년 중국공산당 대회에서 중국 청년들이 항일전쟁에 참여 하는 것으로 보고 홍군에 들어가 참전하였다. 처참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사회 주의 사상에 몰두했지만, 그의 갈증을 채우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그는 1935년 일 본 도쿄의 간다 고서점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읽고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됐다. 1937년 세례를 받고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여 청빈 정신을 기렸다. 마침내 1948년 김익진은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모두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나누 어주었다. 그는 목포를 떠나 대구로 이사하여 중학교 교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 고, 가톨릭시보(현 가톨릭신문)에서 무보수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말년에 《레지오 마리애》, 《동서의 피안》, 《내심낙원》 등 교회서적 번역에 매진하면서 눈이 나빠져 결국 실명하여 어둠속에 갇히게 되었지만, 고통 속에서도 주님의 빛을 찾아서 나아갔다.

바로 그 순간 예전의 우리 집을 보는 듯했다. 나의 부친인 가스발(1915년생)님도 가톨릭신문사 의 서울분실(영업)장으로 근무하셨으니 말이다. 그리고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서울대교구 착좌 식 행사를 지원하셨다. 또한 미군정에도 계셨으 니 아마도 김익진 선생을 잘 아시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부친을 만난 것처럼 눈물이 울컥 나 왔다. 연극 마무리 장면에서 딸 수녀님이 “동방박 사가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날 떠나고 싶다는 소 원이 이루어진 날, 저는 수도원 생활로 임종을 못 지킨 것이 가슴이 아픕니다.”라고 독백하는 대목 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나 역시 부모님의 임종을 제대로 못 지켜드렸다는 그간의 회한이 일어 순 간 눈물을 흘렸다.

 연극을 보고나서 관객들은 성가를 부르며 자 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나라에도 평신도로서 주님 을 사랑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신 분들이 많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의 기록이 어 디엔가 한군데에 모여지기를 희망해본다. 또한 신앙을 대대로 이어온 가족들을 찾아 소개하는 그런 기록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주님의 은총을 받아 췌장암 4기를 극복한 암 환우로서 더욱 교회에 봉사하며 빛으로 나아가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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