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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년 봄 / 계간 63호
    김수환 추기경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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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특집] 사람 사는 사회를 위하여
첨부 작성일 2019-03-29 조회 503

김수환 추기경과 나

 

사람 사는 사회를 위하여


유인태 / 대한민국 국회사무처 사무총장





이 글은 김문태 편집장이 2019년 2월 18일 국회사무처에서 유인태 사무총장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저는(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4년 5개월 복역하였고, 제14대, 17대, 1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서 김수환 추기경님을 70년대, 80년대에는 먼발치에서 뵀어요. 제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1974년에 감옥에 들어가서 4년 반 옥살이를 하고 나왔을 때, 마침 같이 감옥에서 나온 이현배 선배가 가톨릭 신자였는데, 김효순 전 한겨레신문 편집국장과 같이 가서 인사하며 추기경님을 뵀습니다. 1978년에 그처럼 처음 인사드렸는데, 소탈하고 인자하고 온화한 이웃집 할아버지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후 1980년대에 들어서 호헌조치(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개헌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한 정부이양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조치를 발표하였다. 그러자 5월 27일 재야세력과 통일민주당이 연대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여 6월항쟁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가 나왔을 때, 추기경님이 상당히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한 강론을 하셨어요. 그리고 유신정권과 마찬가지로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 때, 6월항쟁의 발단이 되었던 박종철 고문치사 진상(1987년 5월 18일 천주교정 의구현전국사제단이 공식성명을 통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은폐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 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였다.)이 그 안의 전병용 교도관을 통해서, 김정남 전 수석을 통해서, 또 함세웅 신부님을 통해서, 김승훈 신부님과 이부영 선배를 통해서 전해졌어요. 사제단이 단식농성을 하고, 마지막으로 결국 6월항쟁의 정점으로 명동성당에서 시위대가 며칠 묵으면서 항쟁을 했어요. 거의 혁명이었지요. 그 상징적인 장소가 명동성당이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추기경님이 계셨으니까 명동성당이 민주화 운동의 성지가 될 수 있었던 거예요.




그 후에 제가 추기경님을 뵌 것은 국회의원 초선 때였어요. 1992년에 제정구 의원, 원혜영 의원, 이부영 의원 등이 모여서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을 했어요. 우선 조화나 화훼를 안 보내겠다고 한 거예요. 그게 돈이 많이 들어가거든요. 지금은 선거법, 정치자금법에 의해 꽃을 못 보내게 돼 있지만, 그때는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경조사에 꽃을 전부 다 보냈어요. 그것만 해도 몇백만원이 들어갔어요. 14명의 초선 국회의원들이 깨끗한 정치 선언을 했는데, 그때 추기경님이 격려하는 자리를 마련해 주셨어요. 정치자금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고 선언을 하니까 김 추기경님께서 몇몇 원로 어른들을 모시고 저희들을 격려해주는 저녁자리를 마련해 주셨어요.




그리고 제가 제17대 국회 때부터 사형제 폐지를 주도했습니다. 17대와 19대 국회의원이 돼서 두 차례에 걸쳐 국회의원 반수가 넘는 175명, 176명 서명을 받고 사형 폐지 법안을 국회에서 대표 발의하고 활동했습니다. 그때 추기경님께서 혜화동에 계실 때인데, 두세 번 모임에 불러주셨어요.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의장이 되기 전인데, 제가 같이 혜화동에 가자고 했지요. 추기경님께서 제가 사형제 폐지에 앞장서고 있는 것을 격려해 주셨어요. 꼭 그렇게 되게 하라고 격려해 주셨지요. 1997년 김영삼 대통령 말기 이후 22년 동안 사형집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실질적 사형제 폐지 국가로 분류되어 있어요. 그 법안이 아직 통과되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법원에서도 그 이후로 사형선고가 현격히 줄었어요. 사법부도 우리 입법부의 절반 이상이 한꺼번에 서명했다는 것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지요. 예전에는 사형선고 내릴 것도 지금은 무기징역으로 내리고 있어요. 반쯤은 성과를 거둔 것이지요.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사형을 집행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EU국가와 사법 협정 맺을 때, EU에서 잡혀온 형사범에 대해서 사형을 하지 않기로 했거든요. EU에서 잡혀온 사람은 사형을 안 하고, 다른 나라에서 잡혀온 사람은 사형을 하면 위헌소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박근혜 대통령 때에도 사형을 집행하려다 말았거든요.


차라리 사형 집행을 안 할 것이라면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켜야죠.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돼야지요. 우리 국민들은 흉악범이 다시 사회에 복귀해서 어떤 범죄를 벌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는데요. 죽여서 내보내느냐, 죽어서 나오느냐는 차이지요. 사형폐지 종교인협의회에서 법안을 성안해서 제가 의원들 서명을 받아서 대표 발의를 한 거예요. 그런데 검사 출신들이 법사위에 많이 있다 보니까 몇 사람이 끝까지 반대하면 법안을 계류시켜 놓고 통과시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두 번 다 실패했지요. 하지만 저는 머지않아 통과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70년대, 80년대 살아오면서 그분만 한 정치적 지도자가 없으셨잖아요? 그때 어려웠던 사람들, 산업화 과정에서 쫓겨났던 사람들, 제정구 선배가 했던 활동처럼 빈민들을 지역까지 직접 찾아 가셨던 추기경님이셨지요. 정치적으로 탄압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돼서 바닥에 있던 분들에 대한 애정이 강하신 모습을 생각해요. 우리 국민들에게 많은 위안을 주신 분이라는 인상이 깊어요. 물론 70년대, 80년대에 해위 윤보선 전 대통령 같은 분이 유신반대에 앞장서기도 했지만, 그분은 정치인이셨기에 정치적 반대자라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어요. 또 김재준 목사님, 문익환 목사님 등 개신교 쪽에서도 민주화에 상당히 애쓰신 분들도 많이 있었어요. 하지만 추기경님의 존재는 개신교의 개별적인 목사님들과 달리 가톨릭이라는 위상이 갖는 조직의 수장이셨으니까 영향력이 컸어요.


그런 자리에 오른 분들이 대개는 현실과 타협하고 더 영달을 추구하고는 하는데, 그분은 현실 타협을 부정하고 탄압받는 분들을 위해 애를 쓰셨어요. 서슬 퍼런 압제 속에서 좌절하다가도 추기경님과 같은 존재가 용기를 넣어주시니까 그 역할을 헤아리기 어렵지요. 서슬 퍼런 시절에 추기경님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되신 분이었고, 많은 어려운 사람들과 힘든 사람들이 그분의 존재 자체로 위안을 많이 받았습니다. 돌아가신 추기경님이 70년 분단의 아픔을 헤아리시고, 당장 통일은 아니라도 이 땅에 평화가 오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기도해 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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