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보기서울평협 바로가기
> 계간 평신도 > 웹진
계간 평신도
  • 2019년 봄 / 계간 63호
    김수환 추기경과 나
    PDF 다운로드
제목 [특집] 추기경님의 빈자리
첨부 작성일 2019-03-29 조회 496

김수환 추기경과 나

 

추기경님의 빈자리



이현구 안젤라 / 김수환 추기경의 질부





며칠 전 추기경님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전화를 받은 후 우선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온 국민이 존경하는 추기경님을 ‘작은아버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고, 가족의 일원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1969년 추기경님의 장조카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그때 살림살이가 팍팍해 부업으로 피아노 교습을 시작하였습니다. 전공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가르치다 보니 학생 수가 늘어 부업이 본업이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시어머니께 매달 적지만, 성의껏 돈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러던 1994년에 저의 남편 김병호 바르톨로메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추기경님은 ‘병호야, 잘 가그래이’라고 쓴 조화를 보내주셨고, 장례미사를 직접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장지까지 오셔서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 매우 편찮으셔서 많은 분이 기도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그 무렵 집안의 큰 행사로 시댁 식구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할 때, 추기경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불러 시댁 식구들 앞에 서게 하시고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광산 김씨 뒷줄이고, 우리 집안의 기둥은 안젤라다. 안젤라가 그동안 우리 집안을 위해 애쓴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고 하시면서 저의 손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무심한 듯하였던 분의 파격적인 사랑에 저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추기경님은 1년에 세 번 우리 집에 오셨습니다. 설과 추석 때에는 주교관에 근무하시는 분들이 편하게 명절을 지내실 수 있게 하려고 우리 집에 오시거나 외국에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생신 (음력 5월 8일) 때 저희가 조촐한 상을 차려드리면 기뻐하셨습니다. 추기경님이 오실 때면, 가깝게 사는 교우들과 손아랫동서들이 와서 음식을 만들고 본당 신부님과 수녀님 그리고 가까운 교우분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럴 때 추기경님께서는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로 듣고 계셨습니다. 식사 후 주교관으로 가시기 전 주방에서 봉사한 자매들에게 인사하셨는데, 두어 번 본 자매들에게는 그 집 사정에 대해 관심을 갖고 물어보셔서 다들 감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추기경님은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분하셨습니다. 어느 날 우리 집 살림이 어렵다는 것을 아는 한 분이 저에게 교구에서 평화신문사 사옥을 짓고 있는데, 커피 자판기 입찰을 해보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도 되는지 추기경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추기경님은 정색하시면서 “너희가 정식으로 낙찰이 되어도 사람들은 내가 해 준 것으로 안다. 그 누명을 벗을 수가 없다. 그러니 연탄배달을 하든 국수 장사를 하든 추기경의 조카라는 것을 의식하지 말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을 때 참 섭섭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해인가 추기경님을 모시고 식사할 때,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작은아버님은 구청직원만도 못하세요.” 그러자 추기경님께서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남에게 하나를 부탁하면, 그다음에는 내게 열 가지도 넘는 청탁이 들어온다.” 그 말씀을 들은 다음부터 저희는 더욱 조심하면서 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추기경님께서 많은 일로 힘드셨을 텐데, 제 문제로 더 어려움을 드린 것이 얼마나 죄송한 일이었는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저희 아들 바실리오를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1988년 아들이 서강대학교를 지원하였을 때, 합격자 발표가 임박하자 추기경님께서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셔서 여러 번 전화하셨습니다. 당신이 서강대학교 재단 이사장님이셨지만, 대학에 전화하면 폐가 될까봐 우리 집으로 전화하셨습니다. 합격자 발표가 나자마자 즉시 바실리오가 합격하였다고 말씀드리자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2008년부터 추기경님께서 매우 편찮으셨습니다. 저는 1주일에 두 번 정도 찾아뵈었습니다. 그러나 저녁 식사를 드시기 전 집으로 돌아왔는데, 왜 그때 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시중을 들어드리지 못하였는지를 생각하면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해 7월 추기경님께서 성모병원에 입원하셨고, 저는 시간이 나는 대로 자주 찾아뵈었습니다. 하루는 병원 침상에 앉아서 물끄러미 천장을 보고 계셨습니다. 제가 “작은아버님, 무엇을 보고 계세요?”라고 여쭙자 “어머니가 생각나는구나.” 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그 연세에도 어머니를 그리워하시다니’ 하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선종하셨습니다. 저는 추기경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살아왔고, 힘들 때마다 그분은 저의 버팀목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 가슴에는 추기경님의 빈자리가 크게 남아있습니다.





이전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기에 즐겁습니다
다음글 사람 사는 사회를 위하여
      


TOP 위로가기
Copyright ©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All Rights Reserved.

04537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80 (명동2가 1) 가톨릭회관 510호
전화 : 02) 777-2013 / 팩스 : 02) 778-7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