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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평신도
  • 2019년 봄 / 계간 63호
    김수환 추기경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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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눔] 나의 부모님
첨부 작성일 2019-03-31 조회 536

나의 신앙 선조

 

나의 부모님


최은숙 베드로 / 예수의 꽃동네 자매회 원장수녀





‘여러분은 모두 생각을 같이하고 서로 동정하고 형제처럼 사랑하고 자비를 베 풀며 겸손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3,8)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당신께로 이끌어 주십니다.




외조모의 가정이 신앙 공동체가 되기까지


나의 외조모께서는 먹을거리가 귀하던 시절, 농사지은 식량을 모두 도둑맞고 놀라서 속병이 생기셨다. 교우촌인 서근리로 이사한 어느 날, 꿈에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가 나타나 “너는 침을 맞으면 죽고, 예수를 믿어야 병이 낫는다.” 하고 사라졌단다. 두 번이나 같은 꿈을 꾸었기에 반신반의 상태로 공소에 가서 기도 좀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공소 신자들이 집에 와서 기도를 하고 집안에 널려있는 무속의 잔재들을 태웠다. 이에 외조모께서 “너희가 나를 내쫓으려 한다.”라며 그 자리에서 혼절하였다가 정신을 차리셨다. 이런 연유로 외조모께서 며느리와 큰딸인 어머니와 함께 교리문답을 외워 성령강림절에 신덕, 망덕, 애덕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었다. 외조부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믿겠다고 하시더니 요리강령을 보고 마음이 변하여 스스로 세례를 받으셨다. 이를 계기로 외가 전체가 신앙 공동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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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2019-03-31 02245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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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동생들과 왕림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새벽 2시쯤 일어나 도시락을 싸들고 30리가 넘는 길을 걸어다녀야 하였다. 성당에 가다가 넘어지거나 비가 오면 옷을 버려 경건한 차림으로 미사를 드릴 수 없을지 몰라 걱정하였다. 그래서 늘 무명저고리를 보자기에 싸 가지고 가서 성당 근처에서 갈아입고 미사에 들어가셨다.




결혼 후 부모님의 신앙생활


어머니는 연지 곤지를 찍고 결혼식을 올린 후 친정을 떠났다. 가마꾼들이 무겁다고 투덜거리는 소리에 속상해서 내려 걷다가 시댁 근처에서 다시 가마를 타고 가셨다. 이전부터 평생 함께할 남편은 아무것도 없어도 좋으니 같은 신앙을 가진 신앙심 깊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기도했더니 주님께서 들어주셨다. 아버지는 15살 무렵부터 무 릎을 착 꿇고 기도했던 사람이었다. 기도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어디라도 기도하러 가셨다.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신앙에 충실한 분이셨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 면도 있으셨다. 몸이 무거운 아내가 “아지 생선이 먹고 싶다.”고 하자 “돈은 모두 어머님께 드려야 한다.”고 말하는 야속한 남편이었다. 군에서 휴가라도 올라치면, “하느님께 잘 보이지 않으면 전쟁 중에 죽는다.”고 온 모습 그대로 군복을 입고 지냈다. 그리고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둘 사이에 놓고 주무시고 가는 무정한 남편이기도 하였다.


나를 제외한 형제들은 자라면서 한 번씩은 죽을 고비를 맞이하였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신약 성서를 들고 가서 읽고 살려달라고 기도하면 다 살아났다고 하셨다. 한번은 아이가 죽었다고 소문이 난 적도 있었는데, 그 아이마저도 살아났다고 하셨다. 아버지를 위해 미사 봉헌을 하시고 전화 통화를 하면, 아버지께서는 겪고 있던 어려움 이 해결됐다고 하셨단다. 하느님께 빌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믿음에 미사봉헌을 자주 하셨다. 생일에는 우리에게 선물이 미사봉헌이고, 그다음 이 소고기 미역국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교육 방법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우리들은 공부하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성당에 가지 않으면 온갖 듣기 싫은 소리를 다 들어야만 하였다. 집에는 늘 꽃이 있었는데, 사순시기에는 좋아하는 꽃도 치워두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가와 조가를 함께 드렸는데, 어린 나는 많이 졸면서 시간을 때우곤 하였다. 성당 활동은 기본이 었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은 동네아이들과 술래 잡기와 총싸움, 거북이 놀이를 하며 지낸 기억이 새롭다.


한번은 어버이날 선물로 와인 잔에 초를 만들어 선물로 드렸다. 그런데 바로 그날 청소하다가 테이블보를 당기는 바람에 그만 와인 잔의 목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때 하신 말씀이 “교도소에 가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순간의 실수로 그리한 것이다. 그러니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하라.”였다. 무엇을 몰라 물으면 “묻지 말고 사전을 찾아봐라. 그래야만 네 것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훈육하셨던 아버지였다.


일하시다가 공소에 일이 생기면 열 일 내버려 두고 공소로 달려가 일어난 일들을 해결하셨다. 공소가 성당으로 승격된 후에도 아버지께는 성당 일이 항상 우선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이 있어 학교에 오게 되어도 우리의 세례명을 부르며 찾았던 분이셨다. 내게 있어 현실의 어느 부분에서 아버지는 참으로 많이 부족하고, 엄격하고, 무서운 분으로 자리매김한 때이기도 하였다.




나의 성장기 신앙생활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집에 돌아가니 비닐주머니 안에 아주 예쁜 목걸이(염주)가 있기에 꺼내 만지다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악령이 들려 성상을 때려 부수고 난동을 피운 집에 기도하러 가셨다가 가져온 염주였다. 그 말을 듣고는 손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하여 씻고 또 씻다가 결국 그 손으 로 상추쌈을 먹지 못했었다. 며칠 동안….


또 한 번은 JMS라는 종교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지던 때, 건국대 독어독문학과에 다니던 친구가 연극을 한다고 초대하기에 간 적이 있었다. 가 보니 연극이 아니라 그 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고 있는 목사님을 보고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며 집에 간다고 하였다. 그 랬더니 친구의 말인즉 “선배들이 너를 데려오라 고 했다.”고 하였다. 친구가 선배들을 소개시키기에 인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내 발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하고 못내 씁쓸해하였다. 그 후에 친구는 자살을 시도하였다. 깨어나 빛을 발견하거든 꼭 자기에게도 알려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었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세례를 받았고, 크면서 성당에서 많이 보내던 나는 신약보다는 구약의 율법에 더 많이 매여 있었던 것 같다. 중용과 조화의 덕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신부님이 두고 가셨던 많은 책들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피상적인 것들로의 도피를 하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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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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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영혼의 냉담과 열정의 사이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무엇 때문에 왔는가? 왜 사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적인 질문과 방황이 시작되면서 내적 싸움이 길어져 가고 있던 때, 허무와 진리의 가르침 사이를 오가며 고민하였다. 그러던 중 친구가 “학교 앞에 아주 용한 점 집이 있는데, 학생들이 너무 많이 가서 줄지어 기다려야 하는 곳이니 거기 가 보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예약을 하겠다고 해서 고민하던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절대자는 살아있는 신이고, 살아 있다면 내게 말을 할 것이다. 그 신은 유일무이한 신이시니 그분을 알아야 한다. 그분을 알면 온전히 따르리라.’는 생각이 크게 마음에 들어차 올랐다. 점집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는지 샘물 같은 존재, 빛, 성령을 만나게 되었다. 성령께서는 한순간에 나를 허무의 세계로부터 끌어올리시고, 치유하셨으며, 생명이신 그분을 보여주셨다. 성령기도 회에서는 ‘사람들이 드디어 미쳤구나.’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베델에서의 살아계신 하느님 성령께서는 깨달음으로 나의 가정에도 함께 계셨다.

 

 

 

성소 식별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2코린 6,2)

 

장구 배에 피눈물을 흘리던 아프리카 아이의 사진을 보며 선교를 소망하던 나는 수도자가 되면 머리카락 한 올, 뼈 한 조각, 피 한 방울까지 모두 그분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에 꽃동네의 가난한 영성은 한참이나 낯선 것이었다. 그런 내게 주님께서는 “어디에 가든 네게 복을 내리겠지만, 나는 네가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더 기쁘다.” 하시는 것 같았다. ‘어디를 가든 주님께서 복을 주시겠지만,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다면 난 이곳에 머물러야지.’ 하는 생각이 예수의 꽃동네 자매회에 입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신의 신앙이 나의 뿌리입니다


입회 후 내 믿음의 뿌리가 부모님이었다는 것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였다. 60, 70년대 아들 딸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했던 그때, 어머니는 들어선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약을 드시려 하였다. 문득 “아이를 지우는 것이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화장실에 약을 버리셨다고 한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 43,1)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공동생활의 어려움을 마주할 때 견고한 울타리의 보호를 깨닫게 해주셨고, 풍요로운 물질과 많은 사람들 안에서 힘겨워 할 때 기도해 주고 아낌없는 배려해 주신 가족들과 지인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계셨다. 그래서 물질은 소유가 아니라 관리라는 창설자 신부님의 뜻을 알아듣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서 복음삼덕을 살 수 있을 까?’ 고민하고 방황하던 나에게 이곳에서도 충분히 수도생활을, 복음삼덕을 살 수 있다는 답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셨다. 조금 더 굳건히 희생이라는 또 다른 이름인 사랑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머리카락 희어질 쯤, 내 후배들은 더 성숙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구성하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셨다. 많은 분들의 사랑의 기도가 나를 단련시켜 삶의 시련들을 견딜 수 있는 좀 더 성숙한 수도자가 될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래서 절름발이 수도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이 겪는 기쁨과 행복, 고통과 시련, 아픔들을 온전히 공감할 수 있도록 하셨다. 복음삼덕을 철저히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피범벅이 되신 당신은 십자가에 계시지 않고 내게 기대시며 현실과 더 하나가 되라고 하신다. 자선과 구걸 사이에서 걱정하 는 나와 하나가 되어 주시고, 무시와 비판 앞에서 두 손 활짝 펴시어 사람들이 던지는 돌들을 다 막아주셨던 당신! 내 것을 조금 내어드리는 것에도 인색하였음을 영혼이 시퍼렇게 되도록 깨닫게 하시는 당신! 주님을 믿는 이들을 시온산 같게 하시고, 매순간 지혜를 주시고 힘을 주신다.

 

 

 

아! 하느님 당신이셨네요


이제 서원 23년 차! 많이도 부족했던 나는 성령의 인도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희생과 기도로 당신 앞에 서 있다. 오늘도 나를 인도하시고 치유 시키시는 분, 매순간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고자 한다. 부르심에 즉시 “예!” 하고 달려가고자 한다. 나의 생각도 마음도 아닌, 오로지 성령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고자 한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셨던 가난한 이들 안에서 성령과 온전히 일치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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