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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년 여름 / 계간 64호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교회에 주어진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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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눔] 나의 부모님
첨부 작성일 2019-06-15 조회 488

나의 신앙 선조

 

나의 부모님


김승욱 토마스 아퀴나스 / 서강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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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신앙심이 깊으신 부모님의 영향으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주일마다 성당을 다녔기 때문입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성당에 대한 저의 첫 기억은 본당이었던 절두산 성당의 측면 긴 계단과 입구에 놓여있는 순교자상, 그리고 성당 안에 걸려 있던 대형 십자고상입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일요일 아침, 어린이들이 늦잠자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아침 8시경부터 시작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일요일 아침은 참으로 억울하고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재미있는 TV 프로를 뒤로하고 성당에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사 시간은 왜 그렇게 길고 지루한지, 주일 학교는 왜 또 그렇게 가기 싫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죽했으면 미사 마지막에 본당 주임이셨던 김몽은(요한) 신부님이 “미사가 끝났으니 이제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하시면 “아휴… 정말 감사합니다.”를 속으로 연발했던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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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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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식 기념

 

 

제 아버지는 저와 마찬가지로 또한 신앙심이 깊으셨던 친할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성당에 다니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상도 언양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에밀 보드 뱅(Emile Beaudvin) 신부님이 지으신 언양 성당이 있는 곳입니다. 제가 고3 때 돌아가신 제 친할머니(안나)의 기억이 가득 담긴 이 언양 성당은 아직도 제 마음의 고향입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평생 기도와 헌신으로 사신 친할머니에 대한 저의 기억은 그분께서 주일 성당 미사에 참석하시기 위해 곱게 옥색 한복을 차려 입으시고 성당으로 가시던 모습입니다.

 

어려서부터 언양 성당에 다니신 아버지는 옛날 천주교 규정 대로 차가운 성당 바닥에 꿇어앉아 주모경(主母經)을 라틴어로 외우셨다고 합니다. 1930년대, 온 나라가 너무도 가난하고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그 시골에 제대로 된 교통시설이 있을 리 만무했기에 집에서 성당까지는 항상 걸어 다니셨다고 하는데, 아버님 말씀에 따르면 추운 겨울, 어린 나이에 성탄절 자정미사에 참석하러 집에서 성당까지 가려면 너무도 멀고 추워서 ‘이럴 때는 불지옥에라도 잠깐 들러 곁불 좀 쬐고 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하셨다니 참으로 어렵게 다니신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추억으로는 본당 보드뱅 신부님이 미사주는 항상 프랑스에서 수입해서 쓰셨다는데 어린 나이에 복사(服事)를 하면 성체성사 시간에 성당에 퍼져나가는 그 특유의 와인 향기가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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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양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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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영성체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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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관 신부님 흉상 앞에서

 

 

이후, 부산 동래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신 아버지는 이모집에 머물며 학교를 다니셨는데 그때 부산진 성당에서 나중에 예수회 회원이 되시는 안병태 신부님과 함께 성가대 대원으로 활동하며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모부 또한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한국 최초의 예수회 회원인 김태관 신부님의 친형이셨습니다. 제 아버지의 아버지, 즉 친할아버지(요아킴)께서는 아버지께서 어릴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저는 친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친할아버지 하면 항상 아버지의 이모부(이모 할아버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평생 법 없이도 사실 수 있는, 한없이 선량하기만 하셨던 그분께서는 항상 집에서 성경을 읽으시고 연구하는 재야의 성서학자로서 집안에서도 신앙생활과 관련한 모든 문제는 그분께서 규범을 정해주신 게 기억납 니다. 그때만 해도 천주교는 타 종교에 비해 여러 가지 지켜야 할 교회법이 많고 복잡해서 어떻게 해야 옳은 일인지 모를 경우 항상 부모님께서는 이모할아버지에게 여쭈어 보던 기억납니다. 어릴 때 난감했던 일 중 하나는 성체성사 전에는 공복재(空腹齋)를 지켜야 하는데 당시는 생수의 개념이 없을 때인지라 집집마다 보리차를 끓여 먹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분 해석으로는 보리차는 음식으로 분류되므로 성체를 모시기 전에는 마시면 안 된다고 해서 일요일 아침마다 갈증으로 고생 했던 일도 기억납니다. 그 밖에 사순절 시기 대재 (大齋), 소재(小齋)를 지켜야 하는 문제와 연중 지켜야 하는 여러 성사(聖事)들과 축일(祝日)들은 참 어린 마음에는 귀찮고 힘든 일들이었습니다.

 

 

민족의 비극인 6·25 사변 등 국가적 혼란기에 신앙생활과 학업을 이어가던 아버지는 어려움 속에서도 공부를 무척 잘하셨답니다. 서울 수복 후, 서울대 의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셨고 입학과 동시에 서울대 가톨릭 학생회에 가입하여 섭외부(涉外部) 소속으로 활동하셨다고 합니다. 특히 영어를 잘하셔서 당시 로마로 보내는 영문편지를 도맡아 작성하셨는데 의예과 부장이었던 유홍렬(라우렌시오) 교수님께서 이를 눈여겨보시고 기특하게 여겨 당시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던 장면(요한) 총리에게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장면 총리께서는 어려운 조국의 상황에서도 우수한 학생을 미국에 보내 선진 지식을 습득하게 하려는 열망이 있으셨고 아버지 또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어해서 미국 유학을 가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원래는 전공을 살려 의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었으나 장면 총리께서는 이제 한국에도 정치, 외교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필요하다고 설득하여 전공을 정치학으로 바꾸고 학교도 당신께서 직접 미국 가톨릭 예수회 소속의 조지타운대학교 (Georgetown University)로 결정해 추천장을 써 주셨다고 합니다.

 

이후 구호물자를 싣고 온 미국 화물선을 타고 도미하여 학업과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상황에서 장면 총리께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셨고,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학교를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로 옮겨 수학하던 중 4·19 의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있던 한 인 학생들을 모아 지지성명서를 발표하기까지 하셨답니다. 이후, 조국에서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장면 정권이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뻐하셨는데, 이후 5·16 군사쿠데타로 장면 내각이 실각하자 크게 애석해 하셨다고 합니다.

 

 

무사히 학업을 마친 후, 가톨릭 계열의 미국 예수회가 설립한 세인트조셉대학교(St. Joseph’s University)에 교수로 임용된 후 교편을 잡으시다가, 60년대 말 친할머니의 환갑에 즈음하여 한국으로 귀국하였고, 마찬가지로 가톨릭 계열의 예수회 대학인 서강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습 니다. 당시 서강대는 신부님과 천주교 신자 교수님들이 많으셨는데 장면 총리의 차남이자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신 장진(요셉) 교수님도 서강대 생물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계셔서 장면 총리와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의 모교이기도 한 서강대학교는 절두산 성당과, 이후 분가하여 현재 제 본당인 성산동 성당과 함께 제 신앙 생활에 참으로 많은 영향을 준 곳입니다. 제가 유아세례를 받은 곳이 서강대 메리홀 성당이었고, 세례를 주신 신부님이 서강대 교수였던 파렌 신부님(Fr. Farren, S.J.)이셨고, 한국 평신도협의회 회장이셨던 박정훈(요한) 회장님을 대부로 견진성사를 받은 것도 서강대에서였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1993년 주교회의 인준으로 결성된 한국가톨릭 교수협의회 초대회장을 역임하시고 1997년 은퇴 하신 뒤 지금도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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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렌 신부님(Fr. Farren, S.J.)과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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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서강대 방문시 김태관 신부님과 아버지


오늘, 이렇게 ‘나의 신앙 선조’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다 보니 나에게 신앙을 가르쳐 주신 그 많은 분들과 함께했던 날들이 하루하루가 주님의 선물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특별한 영성을 가졌기에 신앙이 생겼다고 한다면 김정일과 김정은의 가르침 덕에 금메달을 땄다고 자랑하는 북한 선수만큼이나 우스운 일이겠지요. 알파고가 아무리 뛰어나도 신앙심까지 학습하지는 못할 것이라 믿기에, 지나온 제 일상의 이야기들이 곧 나날의 신화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말을 새삼 되새기게 되는데 저는 부모님이 보여주시는 모습대로 따라서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도 저에게 언제부터인가 신앙심이 생기게 된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한심하고 부질없는 말이지만,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긴, 몰라야 정상이고 모르니까 인생이겠지요.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있어도 없는 것 처럼 세월을 지켜오는 묵묵한 것들이 집집에는 꼭 깃들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인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어느 여성의 사연이 떠오릅니다. “목화밭 집 딸이었던 외할머니가 손수 딴 목화로 시집 올 때 만들어 오셨던 솜이불이, 비단 홑청 새로 시침해서는 엄마의 혼수 이불이 되었다가, 묵은 솜 곱게 틀어 이제는 자신이 덮고 잔다.”라는 사연이었는데 참으로 낡아서 따듯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너무도 탐스러워 마치 박물지(博物誌)에나 나올 법한 오래된 이야기가 꼭 제 사연처럼 다가옵니다. 저에게 있어서 천주교 신앙이란 솜이불 같다고 생각합니다. 조부모님께 물려받아 부모님이 평생 잘 쓰시고, 이제 또 저에게 물려주신 너무도 소중한 내 영혼의 자산. 무신론자인 제 친구들은 저를 비웃지만 저는 제가 천주교 신자인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인생에서 감사가 정답인 것 같습니다. 행복한 것은 감사한 것이고 감사한 것은 행복한 것이라 믿습니다. 남들이 “그러니까 그 정도밖에 안 되지.”라고 비난한다 해도 전혀 화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늘 그 정도에 감사했고 그래서 항상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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