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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배움] 스승의 리코더 소나타 - 무작정 빈으로 떠나
첨부 작성일 2019-08-16 조회 353

작가를 감동시킨 작품

 

스승의 리코더 소나타

- 무작정 빈으로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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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희 비오 / 수원교구 문호리 본당





1989년 6월 9일


두 달된 딸 아가페, 아내 린다와 함께 26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빈(Wein)의 공중에서 바라본 첫 인상은 도시 전체가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느낌이었다. 베토벤 모차르트가 활동하고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가 태어나 맘껏 예술혼을 펼쳤던 곳, 도시 구석 곳곳이 음악가들 유적지로 뒤덮여 있는 곳이 빈이다. 하루에 평균 200회의 연주회가 열리는 곳, 빈 필하모니, 빈 오페라하우스,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의 혼이 서려 있는 곳,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 빈 숲속, 라데츠키 동상, 자연사박물관, 예술사박물관, 쇤부른 궁전, 12~15세기에 걸쳐 건축된 성 스테판 성당, 무엇보다도 빈 국립음대가 있어서 설레었다.


한국에서의 일은 이미 아득한 저 기억 너머의 일처럼 느껴졌다.


유학 정보가 넘쳐나는 지금과는 달리, 단지 LP음반에 쓰여 있던 연주자 프로필이 빈 국립음대 교수라 찾아온 곳이 빈이다. 계획성 없고 어리석어 보였지만 그때는 나 같은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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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Discogs.com

 


빈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리코더 교수를 찾아가 내 연주를 들려주고 제자로 받아 달라고 청한 일이었다. 게시판에 적힌 레슨실을 보고 찾아간 Hans Maria Kneihs 교수는 사진과 조금 달라 보였지만 살이 조금 찌셨나 생각했다. 교수님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에 수염을 길렀고 덩치는 보기 좋게 커 보였으며 손가락이 가장 맘에 들었다. 나는 내 주변 사람 중에 나보다 굵은 손가락의 소유자를 못 만났는데 이날 그 기록이 깨졌다. 여하튼 교수의 인상은 맘에 들었으며 이날 손가락을 보면서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직감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엄했다. 잠시 느꼈던 기대감이 불안감으로 바뀌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리코더 레슨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내 연주를 들은 교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으며 시간을 뺏긴 데 대한 아무런 대가를 못 얻은 불만 섞인 표정이 역력했다. 게다가 29세의 나이라면 준 대가는 되어 있어야 한다는 충고도 친절히 해주며 별 관심이 없음을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갑자기 유학을 반대하던 주변인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한국에는 리코더 연주가라고는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 리코더 레슨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안정적인 직장인 음악교사직은 사표를 냈으며 이미 수중의 돈도 상당 부분 써버렸으니 그야말로 대책이 없었 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가 다시 바라본 교수의 인상은 몹시 험상궂어 보였고 남에 대한 배려에는 태어날 때부터 없어 보였다. 내 인상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설사 천사같이 보였어도 빨리 이 동양에서 온 이방인과의 만남을 끝내고 싶어 하는 표정을 눈치 없는 나도 읽었다. 같이 간 통역인에게 똑바로 내 얘길 전하라고 하고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한국에는 리코더 선생이 단 한 명도 없으며 나는 리코더가 좋아 혼자 독학한 것이다. 나는 음악교사라는 좋은 직장을 버리고 한국의 첫 리코더 선생이 되고 싶어서 당신한테 왔다. 지금의 나를 평가하지 말고 레슨을 해보고 몇 달 후에 평가해 달라.”

 

내 말이 제법 설득력이 있었는지 아니면 마지 못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교수는 수긍을 했고 태도가 바뀌어 자신의 실기 조교인 Sylvie Hoeflinger에게 레슨을 받아보라고 소개해 주었다. 평생 처음 받아보는 리코더 레슨은 비록 내가 고령(?)임에도 스펀지처럼 빠르게 빨아들였다. 한 달 후 교수가 불러서 갔을 때 교수는 놀라워했다. 향상 속도가 빠르다며 격려해 주었다. 가장 효율적으로 연습하는 방법을 터득해 갔다. 내가 봐도 빠르게 향상되어 갔으며 다시 교수에게 보였을 때 이런 향상 속도라면 입학할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얘기를 들었다. 아마 이때쯤이 LP에 있던 그 교수하고 이 분이 다른 분이란 걸 깨달았다.


Helmut Schaller 교수, 이분이야말로 내 인생에 가장 깊숙이 관련되어 온 분이다. 돌이켜보면 이 분은 빈에서 인격적으로도 존경을 받았으며 동양에서 온 낯선 제자를 정성을 다해 지도하고 보살폈다. 잘못 찾아간 첫 만남부터가 꼬인 것 같았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셨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순간이었다.

 

세 번째 교수 앞에서 연주를 했을 때 실기는 전혀 문제가 없겠다는 얘기를 하셨다.


이론과 청음 시험을 잘 준비하라고 당부하셨다. 단 세 달을 레슨 받았을 뿐인데 입학시험에 문제가 없다니 의구심이 들었지만 교만이 밀려왔다.


시험 날 의기양양하게 실기시험장에 들어섰지만 자신감은 금방 겸손으로 바뀌었다. 다른 수험생들이 나보다 월등히 잘하는 걸 바로 알게 된 것이다. 문제가 없다던 교수님의 말이 배신감과 함께 귓가에 맴돌았지만 기왕 떨어질 거 후회나 없이 하자는 맘으로 연주하고 모두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동안 친절했던 교수에게 예의상 작별인사는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마지막 학생까지 연주를 마치자 교수는 내게 다가와 황홀한 메시지를 주었다.


“축하한다. 나는 너를 선택했다.”


믿기 어려웠다. 분명 7명의 오스트리아 어린 학생들이 나보다 훨씬 뛰어났기에 귀를 의심했 다. 29세의 나이에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모든 걸 포기하고 빈으로 온 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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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 국제고음악제 때 비올라 다감바 주자인 히라오 마사꼬 선생 과 Helmut Schaller 교수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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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진희가 만든 악기를 시연하시는 모습

 

 

이렇게 시작한 빈 유학생활은 정신없이 바빴다. 열망하던 빈 국립음대에 합격은 했지만 한국에서의 경제적인 후원이 없었기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1년 쓸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돈은 6개월 만에 바닥을 보였다. 10월이 되자 중국 집에서 배달 기사를 구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서툰 독일어로 면접을 했다. 운전면허만 있고 운전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5년간 운전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양심이 준엄하게 꾸짖었지만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커다란 트럭에 쌀 야채 콩나물 숙주나물 등 식자재를 가득 싣고 빈 곳곳의 300여 개 중국 식당 중 150군데에 식자재를 배달 하는 일이었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핸들을 잡은 손은 후들후들 떨렸고 지도를 펼쳐놓고 다음 목적지를 찾을 때마다 절망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운전도 못 하고 길도 몰랐으며 독일어도 서툴렀던 것이다. 전찻길에서 신호대기를 하다 전차 경적에 놀라기도 하고 배웠던 것과는 다른 후진기어 시스템에 몇십 분을 스틱과 사투를 벌이기도 했다. 사장은 예상보다 항상 너무 늦게 나타나는 내게 호통을 치기도 하고 미심쩍을 때는 같이 다니기도 했다. 사장이 옆에 타기라도 하면 내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일제히 땀이 분출되는 느낌이 들었다. 사장은 중국인이었는데 나와 동행할 때는 돈이 아까워 자신도 점심을 안 먹었다. 우리는 아주 기본적인 대화만 하면서 하루 종일 동행할 때가 많았는데 사장과 동행하는 날은 으레 굶는 날이었다. 정말 괴로운 동행이었다.

 

사람이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못 이루는 일이 없다는 걸 이때 알았다. 몸은 고되고 스트레스는 일상이 되었지만 음악공부를 하는 것만큼은 행복했다. 나는 행복거리가 그나마 있었다. 학교에 가서 새로운 음악의 세계를 배우고 세계 최고 수준의 음악을 접할 수 있으며 연습으로 지친 심신을 위로할 수 있었지만 아내는 오로지 나 하나만 믿고 말도 안 통하는 유배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돈 거의 안 들이고 살아가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뿐이었다. 마트에서도 물건 사기가 녹록지 않았으며 값싸고 괜찮은 식품을 사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웃거렸다. 한번은 집사람이 너무 싼 소시지를 샀다고 좋아서 상기된 얼굴로 왔는데 애완동물용 식품이었다. 독일어를 모를 때니….

 

연습을 하면서 때때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는 시간에 공부를 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나 하나의 공부를 위해 가족을 고생시킨다는 자책감으로 밤잠을 설친 날이 여러 날이었다. 유학생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는 이사하는 일이었다. 나는 어린 학생들의 이사를 자주 도왔는데 연락이 오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유학생 거의가 내가 무료 이삿짐 센터를 운영하는 걸로 아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남을 돕기만 한 건 아니었고 은인이 더 많았다. 교민 중 어떤 분은 아무 이유 없이, 대가 없이 내 통장에 매달 30만 원씩 송금해 주는 분이 계셨다. 한국에서, 빈에서 너무 많은 은인들의 도움이 있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학교생활은 공부에 목말라 있는 내게 오아시스나 다름없었고 Helmut 교수와 나는 평생 잊지 못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교수는 나를 유럽인처럼 대하기보다 한국인같이 대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대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대해주셨으며 눈치가 빨랐고 내가 뭘 원하는지 나보다 더 빨리 알아차릴 때도 있었다. 한국적인 인간관계와 마음 씀씀이을 좋아했으며 가끔은 자신도 한국인처럼 행동했다. 한국적인 정서가 원래 잘 맞는 분인 것 같다. 레슨 때는 야단을 치거나 큰소리를 치지 않았다. 친절하고 편하게 대해 주었으며 내가 그의 수제자라는 착각이 종종 들게 해주었다. 내가 학생들에게 레슨을 즐겁게 해 준다는 평이 한마디라도 있다면 순전히 교수 덕분이다. 요즘도 스승의 날이면 전화를 해서 한국에선 스승의 날이라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안부를 전하면 그렇게 반길 수가 없다. 돌이켜보면 나는 복이 참 많은 사람이다. 나같이 매사에 계획성 없고 부족한 사람에게 우리 교수를 만나게 해주신 건 분명 주님의 섭리다. 이분을 빼고 내 인생을 얘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작년 스승의 날 즈음에 교수와 식사를 할 수 있었는데 30년 가까이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그 때 형편없이 부족했던 나를 선택했던 이유를,

 

“짧은 시간에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고 아시안에게 잘 못 느꼈던 뛰어난 음악적 감각을 보았다.”

 

사진을 찍기 위해 내 어깨에 올리신 팔이 떨리신다. 가슴이 먹먹하다. 부디 오래도록 건강하셔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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