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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순례] 성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 활동 경로 (중국 동북지역 편) - 제2부
첨부 작성일 2019-11-30 조회 233

성지순례를 다녀오다

 

성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 활동 경로

(중국 동북지역 편) - 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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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환 바르톨로메오 / 서울대교구 청구본당



지난 호에는 중국 접경지대부터 서만자에 이르는 경로를 살펴보았다. 제2부에서는 만리장성에서 요동반도를 거쳐 요녕성, 길림성에 걸치는 경로를 두 신부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가 보기로 한다. (편집자 주)





만리장성


브뤼기에르 주교의 설명대로 서만자 성당을 지나 장가구(張家口)를 거쳐 북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만리장성이다. 이곳은 몽골족이 쳐들어오는 길목을 차단하는 북경의 중요한 전략 요충지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평야 지대 그리고 산맥들 사이의 협곡들에서 이 성벽은 높이가 10~12m로서 방어용 요철을 갖춘 큰 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산맥 위로 올라가면 이 성벽의 높이는 3m 정도 됐다. 산맥 위의 성벽은 각 면 보루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작은 언덕들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인접해 있는 구릉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성벽은 중국과 달단을 물리적으로 갈라놓고 있다. 따라서 남쪽에 있는 산비탈은 중국에 속하며, 북쪽의 것은 달단에 속한다. 나는 장가구라고 부르는 문으로 이 성벽을 통과했다. 러시아인 들이 북경으로 갈 때 바로 이곳을 통과한다.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다. 내가 고용했던 사람들은 아마 나와 내 뒤에 올 사람들이 대담하게 행동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나를 모르는 척했다. 만약 감시가 엄격했더라면 산맥을 넘거나 아니면 세월이 흐르면서 생긴 좁은 길을 통해 만리장성을 지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의 마카오 유학길 코스인 의주에서 북경까지를 살펴보았다. 이후 마카오로 건너간 두 신학생은 아편전쟁 도중 필리핀 롤롬보이로 피신하여 잠시 머문다. 다시 소팔가자(小八家子)로 이동하여 신학수업을 계속하며 부제품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오는 행적은 중국 요동반도 남단 지역과 관련이 있다.




요동반도 남단 태장하(太莊河)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이수하고, 신학 과정에 입문한 김대건과 최양업 신학생은 1842년 2월 15일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마카오를 출발하여 상해를 거쳐 남경조약 체결 현장까지 참관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842년 10월 22일 요동(遼東) 반도의 남단인 태장하 해안에 도착한다. 10월 25일 백가점(白家店, 현 요녕성 장하시 용화산진 차쿠성당 인근) 교우촌의 두 요셉 회장 집에서 유숙하였다. 백 가점은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거점이 된 차쿠 이웃에 있던 교우촌이다. 최양업은 11월 3일 매스트르 신부, 김대건 등과 헤어진 후 만주 선교사 드 브뤼니에르(de Bruniere) 신부와 함께 요동반도 북단에 있는 개주(蓋州) 부근의 양관(陽關) 교우촌을 거쳐 페레올 주교가 있는 소팔가자 교우촌으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김대건은 백가점에 머물면서 매스트르 신부에게 신학을 계속 배우며 조선으로 입국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기해박해로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은 매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조선 입국을 시도하려 했으나 연락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만주 대목구장이었던 베롤 주교조차도 무모하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대건이 조선 변문으로 가서 사정을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1842년 12월 23일 김대건은 중국 쪽 국경인 봉황성 변문을 출발 하여 4일 후 의주 변문 부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대건은 청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에 끼어 있던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조선교회 사정을 자세히 들었는데 자신을 신학교에 보낸 모방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 3명이 모두 순교했고, 동료 최양업의 아버지와 자신의 아버지도 순교했으며 어머니는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매스트르 신부의 입국 가능성 여부를 타진했으나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듣고 자신이 직접 조선에 입국하는 모험을 시도해 보았으나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백가점으로 돌아왔다. 1843년 2월 하순 김대건은 제3대 조선교구장인 페레올 주교가 거처하던 만주 소팔가자 교우촌으로 옮겨 최양업과 함께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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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반도 남단 차쿠(백가점, 용화산)


요동반도 남쪽 장하 시에서 북쪽 70리 거리에 위치한 차쿠는 한국 천주교회의 중국 요동 지역 사적지이다. 차쿠는 마을 이름으로 지금은 용화산이라 부르고 있다. 베롤 주교는 아름답고 높은 첨탑을 가진 차쿠 성당을 건립하였다. 주보를 로마에 있는 ‘눈의 성모 성당’(聖母雪之殿)과 동일한 이름으로 정하였는데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사방이 눈으로 덮이면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 곳에 가기 위해서는 천산산맥의 끝 부분에 속해 있는 높은 산들을 넘어야 한다. 위치에 대해 조선 선교사들은 “성모설지전 성당은 북쪽으로 영광의 산, 남쪽으로 작은 시내에서 몇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계관산(鷄冠山) 사이에 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870년 리델 주교가 차쿠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현재의 위치는 옛 성당 자리가 아니다. 이곳은 요동지역에서도 조선과 가장 근접한 지역으로 중요한 사목 거점이 되었으며, 베르뇌 신부와 최양업 신부도 첫 사목지인 이곳에서 잠시 활동한 적이 있었다. 차쿠 성당(지금의 용화 산 성당)은 1867년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박해로 입국하지 못한 채 이 성당에 거주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파리외방전 교회의 리샤르, 마르티노 그리고 훗날 제7대 조선 교구장에 임명되는 블랑 신부는 1866년의 병인박해 때문에 조선으로 가지 못하고 이곳 차쿠에서 생활하였다. 이어 조선을 탈출한 칼래 신부와 리델 신부도 이곳에 머무르며 재입국을 모색하였다. 1869년 베롤(E. J. F. Verolles, 方) 주교에게 요동 사목의 자치권을 부여받은 리델 신부는 조선 교회의 장상으로서, 또 1870년 이후에는 교구장으로서 모든 활동을 이끌어 나갔다. 우선 그는 조선교구의 대표부를 차쿠에 두고 그 안에 조선 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리샤르 신부를 차쿠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하여 대표부 일과 경리를 맡아보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1876년부터 하나 둘씩 선교사들을 조선에 입국시키기 시작하였다.




개주시 나가점, 양관


양관은 현재 요녕성의 개주시 남동쪽 40~50리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나가점’(羅家店)이라고 불리는 가구 수 50여 호의 한적한 농촌이다. 파리외 방전교회 회원으로 만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베롤 주교는 1840년 양관에 부임하여 아름다운 주교좌 성당(본당 주보는 ‘성 후베르토’)을 건립하였는데, 당시 이 지역의 신자 수는 180명이었다. 이때부터 양관 성당은 만주 남쪽의 전교 중심지가 되었다. 1842년 10월 김대건과 최양업, 매스트르 신부와 만주 선교사 브뤼기에르 신부 일행이 요동 땅에 상륙한 뒤 백가점 교우촌에 머물다가 하나둘 씩 ‘양관’을 거쳐 만주 북쪽의 소팔가자로 올라갔 다. 1843년 12월 31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이 이곳에서 있었으며, 최양업, 김대 건 신학생이나 조선 선교사들은 만주를 여행할 때 자주 이곳에 들렀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신부도 만주 선교사로 있을 당시 이 성당에 거처하면서 사목하였고, 최양업 신부는 1849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직후 요동으로 건너와 7개월 동안 베르뇌 신부의 보좌 신부로 양관에서 첫 사목을 시작하였다. “저는 5월 에 함선을 타고 상해를 떠나 다시 요동으로 왔습니다. 7개월 동안 머물면서 만주 대목구장 직무 대행을 맡고 있는 베르뇌 신부님의 명에 따라 병자들을 방문하고, 주일과 축일에는 신자들에게 짧은 강론을 하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큰 축일에는 고해성사를 주며 성체를 배령해 주는 일에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최양업 신부의 1850년 10월 1일자 서한)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1869년 조선 선교사들이 베롤 주교에게 요동 일부의 사목 재치권을 이관 받게 되면서 양관 지역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지금 양관 성당의 옛 터는 마을 뒤편에 있으며, 폐교된 초등학교 건물(6칸)과 옛 성당의 주황색 벽돌담만이 남아 있다. 베롤 주교가 지은 처음의 성당은 문화 혁명(1966~1976년) 때 홍위병들에게 파괴되었다고 한다. 현 성당은 폐교된 초등학교 건물 오른 쪽 첫째 칸에 마련되어 있다. 성당이라기보다 시골 공소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평소에 문이 잠겨 있는 초라한 모습을 보며 우리 한국 신앙 선조들이 떠올라 발걸음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소팔가자


길림성(吉林省) 장춘시(長春市)에서 약 30㎞ 거리에 있는 소팔가자 마을로 가는 도중 성당 약 10㎞ 이전 지점에 ‘김대건로(金大建路)’라는 표지석이 있다. 소팔가자 성당을 찾는 신자들에게 순례길의 의미를 더하자는 서울대교구 신자들의 정성으로 1999년에 완공되었다. 중국 당국은 도로 등에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고 있으나 이 경우는 특별히 허락하였고 정부 측에서도 도로 공사비용 일부를 지원하여 김대건로의 완공은 한국과 중국 천주교 상호교류의 시작점이 되었다. 1796년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소팔가자는 1838년 요동대목구가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면서 파리외방전교회가 사목을 담당했다. 만주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베롤 주교가 1841년 소팔 가자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여 성당을 건립하였다. 성당 뒤쪽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있다. 성역화 추진위가 지난 1998년 건립한 고(故) 김세중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의 작품이다. 김대건 신부의 동상은 갓과 두루마기 차림으로 왼손에는 성경을 들고 오른손은 앞을 향하고 있으며 방향을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동상 뒤쪽 김대건 신부가 거처했던 장소에 5층짜리 피정(순례자)의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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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팔가자 성당 가는 길의 김대건 로

 

 

소팔가자는 장춘 서북쪽 사평(四平) 인근에 있던 교우촌이다. 1843년 1월 6일 김대건은 1843년 3월 백가점에서 소팔가자로 거처를 이전하였다. 1843년 초 페레올 주교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칙서를 받아 제3대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31일 개주의 양관에서 만주 대목구장 베롤 주교 집전으로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이 거행되었다. 1844년 1월 14일 최양업은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 공부를 계속하고 1월 말 페레올 주교도 소팔가자로 귀환하였다. 4월에 조선의 동북쪽 입국에 실패한 김대건도 훈춘(琿春)에서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4∼12월 신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삭발례로부터 제 1∼5품까지 받고, 김대건과 최양업은 이곳에서 함께 부제로 서품되었다. 1845년 상해로 건너간 김대건은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10월 12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신부와 함께 충청도 황산포 나바위를 거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반면 최양업 부제는 1846년 1월 말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을 위한 두 번째 탐색 여행을 위해 훈춘으로 갔다.

 

 

 

마치며


김대건, 최양업 두 사제의 발자취를 중국 동부 지방을 중심으로 2회에 걸쳐 소개하였다. 제2부는 요동반도 남부 쪽에서부터 북경에 이르는 한국 천주교 관련 성지·사적지를 살펴보았다. 추가적으로 필리핀 마닐라와 롤롬보이, 마카오를 거쳐 사제 서품 장소인 상해, 제주 표착지, 이후 활동 경로 등 살펴볼 곳이 다수 존재한다. 순례길을 다녀 올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보살펴주신 하느님께 찬미, 감사와 흠숭을 드리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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