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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년 겨울 / 계간 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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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순례] 불멸의 성지 - 예루살렘
첨부 작성일 2019-11-30 조회 208

성지순례를 다녀오다

 

불멸의 성지

-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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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창 미카엘 / 평화방송여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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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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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돔 모스크

 

 

언덕 위에 놓인 자그마하고 먼지투성이 도시 예루살렘!

 

이름만으로도 고귀함을 느끼게 되는 그 도시의 첫인상은 그리 평화롭지 않습니다. 사실 이곳 예루살렘은 끔찍하고 참담하도록 피비린내 나는 전쟁사의 현장이며, 신앙심 깊은 유다인, 그리스도인, 무슬림들의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동시에 파괴와 불신과 고통의 신음소리가 여전히 우리의 귓가에 스치는 곳입니다. 평화와 정의가 가 득해서 절로 기도가 되는 거룩하고 경건한 도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차분하게 나를 돌아보고 오직 예수님의 발자취를 묵묵히 따르려는 순례자들의 기대는 금방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예루살렘을 하늘에서 내려다봅니다. 예루살렘의 동쪽은 유다 사막으로 이어지는데, 이 사막은 메마르고 바랜 옅은 갈색의 황무지로서 지구상에서 가장 수심이 깊고 수면이 가장 낮으며 가장 소금기가 많은 사해(死海)까지 이어집니다. 1600여 년 전에 이곳을 지나던 예로 니모 성인은 소금기 때문에 단 한 마리의 생물체도 살지 않고 그 넓은 수면 위에 새 한 마리 날아다니지 않은 모습을 보고 ‘죽음의 바다 (Dead Sea)’라고 불렀으며 그 이름이 여전히 유효한 곳입니다. 예루살렘의 서쪽은 70km 정도 떨어진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습기 찬 바람을 막아주듯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들어선 언덕들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 골짜기를 따라가면 삼손과 들릴라의 이야기가 들려오고 세례자 요한의 어린 시절 전승들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예루살렘의 남쪽은 광야와 사막의 경계를 이루는 도시들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중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베들레헴, 헤브론, 브엘쉐바가 포함됩니다. 예루살렘의 북쪽은 예루살렘보다 높은 언덕을 넘어 사마리아 지방을 향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통치가 끝나고 분열된 북이스라엘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과 타협하며 신앙을 변질시켰던 그 오욕의 역사 속에서 구약의 예언자들의 준엄한 심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구세주의 피땀이 적셔진 올리브 산, 주님의 계율이 퍼져야 할 시온 산,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던 모리야 산, 그리고 이스라엘 이 아니 우리 모두가 주님을 단죄하고 채찍질하며 그분의 마지막 밤을 심연의 구덩이에 던져버리고 십자가를 어깨에 메게 만든 ‘십자가의 길(via Dolorosa)’과 골고타 언덕. 이 모두가 예루살렘을 이루는 장소들입니다. 척박해 보이는 언덕들, 그 석회암의 바위 위에 희생을 위해 뿌려진 피가 넘칠 때 이 도시가 조금씩 거룩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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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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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학자와 이슬람 이맘

 

 

이스라엘 특히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의 길은 기본적으로 성찰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찰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압니다. 스스로 그 고통에 참여하고자 세상 곳곳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 줍니다. 사실 세상의 악(惡)에 무관심한 것은 악 그 자체보다 더 사악하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무관심은 삶의 방식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양심은 조잡해지며 영혼을 차갑게 만듭니다. “무관심은 사실 천사의 눈에 눈물을 맺게 만든 특별한 특징”이라는 옛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세상이 하나로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나 혼자 행복하고 평화로울 수 없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나 혼자만을 위해 혹은 나와 관련된 몇몇만을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고 살아 왔으며 그로 인해 작은 세상의 행복을 가졌다고 자위했던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나를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음의 길을 걸었던 2,000년 전 예수의 눈망울을 마주하고 절규합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말합니다. ‘지옥 이란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받는 장소’라고 말입니다. 그 사랑은 결코 편협해서는 안 되는 사랑인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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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덤성당


예루살렘을 걷습니다. 중동의 햇살은 생각보다 따갑습니다. 마치 예수 시대에도 이랬을 것 같은 온갖 냄새와 먼지 그리고 차가운 시선들까지 느껴집니다. 좁고 구부러 진 오래된 예루살렘의 시가지는 우리를 기도로 이끌지 못합니다. 사형언도를 받고 해골(골고타)언덕 위에 마련된 처형장까지 걸었던 예수만을 따르려고 하지만, 자동소형화기를 둘러메고 냉소적인 눈으로 쳐다보는 이스라엘 군인들과 그들을 향해 알아채지 못하도록 적대적인 눈길을 숨기고 가식적인 웃음으로 한숨을 옅게 내쉬는 무슬림들 사이에서 장사꾼들마저 우리의 기도를 악의적으로 방해하는 듯합니다. 성당의 불을 모두 끄고 몇 개의 촛불에 의지해 깊은 묵상으로 이끌어내던 우리의 ‘십자가의 길’ 기도는 이내 평정심을 잃어버립니다. 골고타 언덕에서 마저 거만하고 거칠게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정교회 사제들과 날카로운 눈을 가진 프란치스칸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움츠러든 어깨 속에 팽팽한 긴장을 간직한 소수의 콥틱 사제들이 결국 기도를 망쳐버립니다. 내 기도는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골고타 언덕을 내려와 예수의 시신을 염했던 장소에 마련된 돌을 바라봅니다. 나르드 향유가 넘치도록 문질러대는 정교회 신자들이 왠지 기복적으로만 보여서 잠시 손바닥만 대고 지나갔던 곳입니다.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주님의 무덤에 들어가기 위해 몇 시간 동안이나 줄을 서야 하고 새치기를 하는 이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문득 문지기들에게 눈짓을 하고 뭔가를 쥐어주면서 맨 앞에 줄을 서버리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도 무덤에서 나오면서 몇 차례나 성호를 긋고 머리를 땅에 대고 경건한 자세를 취합니다. 순간적인 분노가 치오릅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오직 무덤을 향해서만 한 걸음씩 걸어가는 순례자들이 눈에 보입니다. 그들도 내가 본 것을 보고 있고 내가 숨 쉬는 공간에서 같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 가득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가 다시 밝혀지는 순간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가쁘게 숨을 쉬다가 갑자기 고개가 꺾이며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한 그분의 마지막을 느낍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갑자기 성경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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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무덤성당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고 그분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완전해집니다.”(1요한 4,12)


그분이 사셨던 세상도 이 모습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분이 사셨던 삶이 결코 평화와 선이 가득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따르는 이들은 모두 천대받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분이 특별히 뽑으신 제자들 중 한 명은 그분을 팔아넘기고 또 다른 한 명은 그분의 눈길과 마주치면서도 세 번이나 그분을 모른다고 했었습니다. 참담하고 처절하고 비통한 마지막 길을 그분이 걸으셨던 것입니다. 오직 어머니와 몇몇의 여인들만이 그곳 그 어디선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모습으로 그저 죽음의 순간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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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무덤성당에서의 콥틱 전례

 

 

매 순간 실패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족한 사랑도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섰고 그곳에서 더욱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사랑에 이끌려 골고타에 오셨고 그곳에서 더욱 하느님의 사랑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좌절을 경험하지만 그때야말로 성령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사 랑을 느낄 수 있는 때입니다. 우리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음을 말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시간이 따로 있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사실 언제나 기도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느님께 말하 지 않는 시간도 있고 때로는 다정하게 말하는 시간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언제나 그분과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분의 발자취를 찾아 떠나는 이스라엘의 시간들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을 배우고 갑니다. 그분의 발자취는 내가 걸어온 발자취 위에 겹쳐 있었습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에도 계셨지만 지금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십니다.


예루살렘 주님 무덤성당을 걸어 나오며 순례자들은 한껏 기뻐합니다. 이제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주고 자신은 가져가지 않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 방식이라는 것을!! 섬기지만 지배하지 않고, 필요하다면 죽고 다시는 살지 않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 방식이라는 것을!! 결국 이런 하느님의 사랑 방식이야말로 “모든 것을 가지게 되고 결국엔 영원히 다시 사는 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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