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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배움] 이웃과 사회공동체
첨부 작성일 2018-04-09 조회 597

인문학 강좌

이웃과 사회공동체

김문태 힐라리오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수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인간은 이성과 의지를 지닌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여 연대감을 갖고 자아실현과 사회공동체 발전에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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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밖으로 나가 서로 접하여 사는 이들을 이웃이라 부른다. 이웃에 살며 정이 들어 친분이 두터운 이들을 이웃사촌이라 칭한다. 예전에는 이웃의 대소사와 애경사를 챙길 뿐만 아니라, 빈대떡만 부쳐도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이사하면 으레 이웃에게 떡 접시를 돌리고, 이웃은 그 보답으로 과일 한 알이라도 접시에 올려 되돌려 줌으로써 마음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웃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애정이 식어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마을과 마을, 지자체와 지자체 간에도 공동운명체로서의 인식이 박약해지고 말았다. 내가 사는 곳에 장애인ㆍ노숙자 등을 위한 사회복지시설, 화장장, 쓰레기 매립장, 하수종말처리장, 핵 폐기물 처리장 등과 같은 혐오시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들어설 수 없다고 입을 모아 악다구니를 쓰게 되었다. 반면에 조금이라도 이익이 된다고 여겨지는 시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사는 곳에 유치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게 되었다. 지방자치제에 따라 극성하게 된 집단이기주의인 소위 님비(not in my back yard)와 핌피(please in my front yard) 현상이 바로 그러하다.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한 편이 떠오른다.

 

신라 성덕왕 때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라는 두 친구가 도를 닦기 위해 산 속에 암자를 따로 짓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아리따운 낭자가 달달박박의 암자에 찾아와 의미심장한 시를 지어 부르며 하룻밤 묵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달달박박은 사찰은 깨끗해야 하니 여인이 가까이 올 곳이 아니라며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이어 낭자는 노힐부득의 암자에 찾아가 또 다른 노래를 부르며 재워 주기를 청하였다. 노힐부득은 중생의 뜻에 따르는 것도 보살행의 하나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더욱이 깊은 산골에 밤이 어두우니 어찌 소홀히 하겠느냐며 안으로 맞아들였다. 노힐부득은 잡념을 물리치기 위해 밤새 염불을 쉬지 않았다. 그러 던 중 낭자가 해산기가 있다며 도움을 청하였다. 노힐부득은 하는 수 없이 방에 짚자리를 깔아 주고, 물을 데워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도왔다. 해산한 낭자는 노힐부득도 그 물에 목욕하라고 권하였다. 노힐부득이 마지못해 그 말에 따르자 물에 연화대가 생겼다. 그제야 낭자는 자신이 관음보살이며, 대사를 도우려 왔다고 실토하였다. 이튿날 달달박박이 찾아가 보니 몸이 금빛으로 물든 노힐부득이 연화대에 앉아 미륵존상이 되어 광채를 내고 있었다. 달달박박이 사연을 듣고 후회하자 노힐부득이 목욕을 권해 그 역시 무량수불이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구름을 타고 서방으로 갔다.(『삼국유 사』권3 탑상4 남백월이성 노힐부득 달달박박)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서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데 도움을 주는 존재였다. 여인으로 현신한 관음보살은 수행자들의 성향에 따라 달리 시험하였다. 관음보살은 자신이 득도하고 난 후에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소승적 성향의 수행자인 달달박박보다 중생과 더불어 득도하겠다는 대승적 성향의 노힐부득을 먼저 득도하게 하였다. 이러한 관음보살의 선택은 달달박박이 행한 소승적 수행방식보다는 노힐부득이 행한 대승적 수행 방식을 높이 평가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관음보살이 소승적 수행방법에 대해 잘못이라거나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소승적 수행 자세를 지니고 있던 달달박박 역시 노힐부득과 마찬가지로 득도하였으니 말이다. 수행방식은 시대상황과 종단의 선택, 그리고 개인의 기질에 따라 최고선이 결정된다. 하지만 중생과 함께하고자 하는 대승적 수행방식이 우위에 선 것은 이 이야기를 전승하던 이들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시회공동체 의식은 오래전부터 나와 이웃이 더불어 살아가는 데 주안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사회공동체는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와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사회로 전환되면서 점차 공동사회에서 이익사회로 변모되었다. 자연히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사회와 사회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데 있어 이웃에게 한 치의 양보도 없게 되었다. 이러한 면모는 개인주의 내지 자유주의가 사회집단주의 내지 전체주의와 대립 갈등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즉 개인주의 내지 자유주의는 개인의 발달과 완성이 최고 목적이므로 사회공동체는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진 필요악과 같은 계약의 산물이라고 정의한다. 반면 사회집단주의 내지 전체주의는 개인을 집단 전체의 목적에 종속시키므로 개인은 사회라는 유기체의 세포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상반된 목적을 융합하여 양자를 조화롭게 공존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동선(共同善)이다.

 

공동선은 사회보존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모든 정신적·물질적 가치와 재화로서 사회에 이익이 되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 각자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인식이다. 즉 개인의 발전과 이익이 곧 사회공동체의 발전과 이익이며, 역으로 전체로서의 사회공동체를 위하는 것이 곧 개개인을 위하는 길이라는 인식인 것이다. ‘사회 질서와 그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여야 한다.’(<사목헌장> 26항)는 가르침에 주목하는 한편, ‘가톨릭 신자들은 진정한 공동선을 증진하여야 할 책무를 자각하여, 국가 권력이 올바로 행사되고 법률이 도덕률과 공동선에 부응하도록 그 의견을 관철시켜야 한 다.’(<평신도 교령>14항)는 선언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다.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인간은 이성과 의지를 지닌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여 연대감을 갖고 자아실현과 사회공동체 발전에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공동선을 이야기하다 보면 누군가는 극단적인 예를 들며 반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노힐부득이나 달달박박처럼 깊은 산속의 암자에서 홀로 수도하는 이들이 과연 사회에 도움을 주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또는 우리 가톨릭교회의 봉쇄수도원이 사회공동체의 발전과 이익에 기여하고 있는지에 대해 노골적인 회의를 드러내기도 한다. 홀로 자신의 길을 가는 수도자들은 자신들만의 삶을 영위하기에 공동선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수도자 개인 입장에서는 사회공동체를 떠났다고는 하지만, 의식주를 비롯한 기본적인 생활용품들을 자급자족하지 않는 한 그가 사회공동체에서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반대로 사회공동체의 입장에서는 수도자가 격리되어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들의 열망이 오로지 수도자 개인의 영달과 행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공동체에 이바지하는 바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을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보이지 않는 기도와 기원이 사회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큰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개인과 사회공동체가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누가 자신의 이웃이냐고 묻는 율법교사에게 들려준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가 오늘도 새롭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본체만체하였지만, 유다인들에게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던가. 나는 이웃과 사회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 되돌아보게 되는 대목이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 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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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착한 사마리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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